한국과 일본의 엇갈린 민주주의 방향성
1월 31일, 영국 <이코노미스트>에서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가 발표됐다. 매년 공개되는 지수로, 신뢰도가 높은 지수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관심 가졌던 것은 작년 한해 한국 상황(촛불 시위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과 일본의 퇴보가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 였다.
결과는 대체로 예상대로 였다. 한국은 평가가 다소 올라갔고, 일본은 내려갔다. 한국은 8.00 점으로 불완전한 민주주의(flawed democracy)와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사이에 턱걸이했다(결과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7점대로 떨어졌던 데 비해서 다소 회복한 셈이다.
일본은 어땠을까. 7.88로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이어가며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이로써 지표상으로는 한국이 아시아권 최고점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이코노미스트 보고서는 '공격받는 표현 자유(free speech under attack)'라는 표제로,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후퇴를 지적하고 있다.
일본에 관해서는 "정치적 참가와 정치 문화의 상대적 취약성이 일본을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머물게 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정치적 참가(political participation)는 6.11을 기록해,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힘든 이전 수준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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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이번엔 일본의 정치 외교 관련된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본 민주주의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다른 글에서도 계속 언급해온 부분이긴 한데, 그런 글들의 '소종합판'이라 여겨주시면 감사하겠다.
우선, 필자는 일본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냉전 회피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1950년대 이후 이른바 '냉전시대' 일본은 별다른 분쟁에 얽혀들지 않으면서 안온한 상황을 구가할 수 있었다. 국내적으로 다소간의 분쟁은 있을지언정 국제적인 분쟁과는 맥락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 좌파 세력(특히 적군파 등 극단세력)이 테러에 버금가는 행위(아사마 산장 점거 사건, 요도호 납치 등)를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국내 치안문제였다. 한국과 같이 북한에서 직접 침투해온다든지, 냉전을 이유로 독재정치가 강화되는 일은 최소한 없었다. 일반인들도 냉전의 희생물이 된다는 의식이 없었다(이는 뒤늦게 북한에 의한 납치문제로 사실이 아님이 드러남).
민주주의 체제는 자민당 1당 중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자민당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무리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 언론과 학계의 자유로운 비판과 부정없는 선거는 전후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근간이었다. 한국 보수 정당과 자민당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특히 중요한 건 고도경제성장이었다. 60년대 도쿄올림픽과 급격한 성장, 그리고 일반인들의 성숙해가는 질서의식 등이 맞물려 70년대에 이미 일본은 여러면에서 선진국이라고 불릴만 했다.
공산주의 국가와 관계는 더욱 극적이다.
이미 소련과는 1956년 국교정상화에 가까운 합의(소일공동선언)를 했고, 중국과도 1972년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후자는 미국보다도 빠르게 이뤄진 것으로 당시 세계에 충격파를 안겼다. 80년대에 모 일본회사는 소련에 무기 관련 부품을 팔다 적발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북한과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1야당 사회당 당수는 종종 김일성과 만나 회담을 하고 지원을 논의했고, 정부 차원에서 거액 차관을 제공한 일도 있었다. 50~60년대 재일동포를 북한에 보내는 사업(귀국사업)이 시작될 때, 일본 언론은 북한 사회주의를 찬양하다시피했다(이 역시 북한의 사기에 가까웠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격렬하게 벌어진 '냉전'과 무관한 길을 꽤 오랜 기간 걸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현재까지도 한국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겠거니 상상만 될 뿐이다. 필자가 일본에 와서 충격을 받으며 깨달은 게 냉전 기간 중 한국와 일본의 놓여진 상황이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은 미국의 비호가 있을 테고, 그와 맞물려 중요한 게 일본에는 가장 큰 반동세력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군대'가 애초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본격 출발한 자위대는 냉전시대 내내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돼왔다. 예산과 인사에서도 주도권이 없었고, 이는 일반인들의 뿌리깊은 '반군국주의'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적대감은 몇몇 강경 세력의 구호에 그쳤고, 한국과 같은 '반공 교육'이 전면적으로 시행된 일도 없었다.
물론 키시 노부스케 등 전범이 '역코스(逆コース, 전쟁 관여자들의 부활)'로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대부분 문관들이었다. 군부 세력은 쉽게 부활할 수 없었다.
이를 통해 국방에 쓸 자원을 다른 곳, 특히 경제에 돌릴 수 있었다. 안보와 관련해선 미일동맹(일본 내 미군기지, 특히 오키나와)을 유지만 할 수 있다면 흔히 있을 국방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겪지 않아도 됐다. 마찬가지로, 냉전 붕괴 후 미군에 의한 여중생 성폭행사건(1995년)으로 오키나와가 주목받게 된 건 특기할 만한다.
한국이 60년대 이후 군사 쿠데타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상상할 때, 이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80년대까지도 한국은 군부독재에 신음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민주주의가 여전히 군부 쿠데타로 휘청이는 걸 보면 '군부의 부재'는 중요한 요인이다.
일본이 군대를 두지 않은 건 단순히 과거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이익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 없는 민주주의'가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민주주의는 피를 통해 성장한다'는 말이 있듯, 반민주세력과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한층 더 나은 길로 가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이다.
한국은 대다수 젊은 남성들이 군대를 경험하며 끊임없이 모순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는 북한과 총을 들고 대립한다는 냉전이라는 현실, 그리고 군부의 우두머리가 나라의 리더라는 군사 국가에 산다는 현실을 통해, 냉전은 실제 발디딘 리얼리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일본 민주주의는 '전쟁에 패해 미국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별다른 내부 투쟁을 겪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단련되지 않은, 허약한 민주주의로서 일본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점이라 하겠다.
국제정치학자 피터 카첸스타인(Peter J. Katzenstein)은 전후 일본 정치에 대해 "시민들의 논의, 정치적 설명책임, 정보가 충분히 주어진 정치적 선택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지적하면서 "소수 정치 집단이 경제적 성장과 해외 진출로 이득을 보는 체제"라고 했다. 이를 '가운데에 거미가 없는 거미줄'이라고 평하며 "이같은 체제가 자유 민주주의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책임 문제를 저해했다"고 꼬집었다(<Cultural Norms & National Security>, 13쪽).
냉전이 무너진 90년대 이후 상황은 일본 민주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내구력이 약한 민주주의의 약점을 잇따라 노출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위협이라는 변수가 등장했고, 이는 일본에 새로운 위협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본 민주주의의 한계는 '군대를 두지 않는 것' 자체가 금과옥조로 여겨진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앞서 밝혔듯, 민주주의는 군대가 없는 게 아니라, '어떻게 군대를 통제하고 민주주의적 원리하에 두느냐'에 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거의 전무에 가까울 정도로 논의가 없고(일단 리버럴 세력은 군대를 둬야 한다는 논의자체를 거부해오면서 자위대는 그 틈에도 끊임없이 권한이 확대돼왔다), 정부가 알아서 해왔다.
한 가지 또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표면화다. 2002년 9월, 코이즈미 당시 수상이 김정일을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김정일은 냉전시대 북한 공작원이 일본 시민을 납치한 사실이 있음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이는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자신들이 믿어온 '안온한 냉전'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물론 다른 국가, 특히 한국이 겪은 피해와 비교하면 굉장히 작은 것이 사실).
보수 우파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자신들의 가치, 즉, 군사적 대응과 북한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을 내걸며 인기를 모은다. 아베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제는, 납치문제가 민주적 가치를 통한 해결이 아니라, 철저히 민주적 가치에 반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뒤늦게 분 북풍'은 여전히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
냉전 시기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안온하게 있어온 일본은 갑작스러운 적대적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극우주의자인 아베와 같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적 군부 통제 개념이 없는 지도자가 장기 집권을 하고,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여성 극우(이나다 토모미)를 방위성 대신에 앉히는 등, 외부자가 보기에 불안한 노선을 이어가고 있다.
아베는 각종 무리한 수단을 써가며 일본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논쟁이 있는 법안은 숫자로 밀어붙이고, 야당과의 토론에는 제대로 응하지 않는다. 국민들도 이에 대해 의문은 가지면서 또 적극적으로 목소리는 내지 않는다.
일본 시민 사회와 야당은'무엇이 민주주의의 후퇴인지'를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 그저 '헌법9조(전쟁 및 군대 포기) 수호'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니 다른 절차적 민주주의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후퇴하고 있는 데 대해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 '군대 없는 민주주의'를 이상화하고 지키는 게 정답일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일본 젊은이들은 더 이상 '군대없는 민주주의'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극우 세력의 재군비라는 흐름이 아니라, 온건한 민주체제하의 변화로 이끌어야 하는 게, 현재 일본 리버럴 세력의 과제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군대 반대'만 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른바 '우경화 흐름'은 일차원적인 것이 아님에도, 대응은 부족하다.
원전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민의 여론은 원전 반대가 명확하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된 목소리로 모으지 못하고 아베의 원전 재가동 정책을 방관만 하고 있다. 당연히 역량 부족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약한 야당 역시 냉전 체제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만.
한국에 대한 반감과 중국, 북한에 적대의식은 기본적으로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냉전 후 일본의 처지를 상징한다. 정치적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한국에, 경제 성장에서는 중국에 뒤지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정신승리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
한국, 한국인은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 같은 극단적 비민주적 국가가 주위에 있음에도 민주주의에 대해선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들 국가에 영향 받아 민주주의를 후퇴시켜선 안되고, 그럴 일도 없다는 최소한의 신뢰가 있다. 냉전시대 수차례 '예방주사'를 맞아왔고, 냉전의 붕괴와 함께 시민들의 힘(+미국, 소련 등 대외 세력의 우호적 변화)으로 민주화를 이뤘다.
민주화 이후에는 북한이라는 최대 민주주의 저해요인과도 적대정책 외에 다양한 수단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근 아이스하키 단일팀 문제와 맞물려 나오는 반대의견과 다양한 생각들은 민주주의 한국의 북한관이 한단계 높아졌음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됐다. 더이상 무조건적인 통일이나 융합이 아니라, 존중과 진정한 평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과거 독재 세력도 입으로는 늘 통일과 화합을 말해왔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일본 리버럴 세력에는 이들 주위 비민주 국가가 민주주의를 해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여기서 그것은 이들 국가의 비민주성이 확대될수록 일본이 군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데 대한 불안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대외문제이기 때문에 국내 세력이 손쓸 방도가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납치문제 이후 '대화'는 애초 꺼낼 수도 없는 숨막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자민당 내 보수세력은 비민주 국가를 이유로 일본도 민주주의를 다소 후퇴시켜 대응해야 한다는 모습을 보인다. 국민들 일각에서도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 없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코노미스트>가 보여주는 한국과 일본의 엇갈린 흐름은, 근본적으로 양국 민주주의의 내구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후퇴를 깨우치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제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한 한계라 할까, 문제의식을 느끼는 시민들도 적지 않지만 현재는 비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