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항해했던 12일의 기록
2016년 12월 김승진 선장님의 '타노아'호에 처음으로 승선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만 떠올려도 행복한 크루들과 함께 지중해를 건넜습니다.
지독하게 고생하고, 정말 행복하게 세일링했습니다.
바다 위에서 우리의 재잘거림이 멈추지 않았죠.
하지만 돌아와서 보니 함께했던 크루들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다'입니다.
눈만 감으면 쏴쏴~ 하는 파도의 소리,
시킁하게 설레던 밤바다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17년 7월.
저는 못 참고 다시 한번 그 바다를 만나러 북태평양으로 떠났습니다.
불쑥 떠나온 저를 따뜻하게 반겨준 김승진 선장님. 그리고 박선장님, 주피디님, 준용이, 태완이형, 수민이 등등 크루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분명 내 집은 서울인데, 고향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이판에서 나가사키까지 약 2,000km. 12일간의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태풍, 거대한 돌풍, 번개 지옥, 지독한 더위.
역시나 위험한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 자연 속에서 자유를 만끽했던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태평양 여행 후 바다가 제 안에 흘러 들어왔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바빠지면 바다가 알려준 데로 한 숨 쉬어가고,
자잘한 문제들은 넓게 보려고 가슴을 펴고 있습니다.
서두른다고 일이 잘되지는 않으니까요.
덕분에 이젠 쫓기는 꿈을 꾸다 땀을 흘리며 일어나지도 않고,
나를 옥죄는 자잘한 것들을 조금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안 하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어요.
바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물을 틀어놓고 손을 씻는 순간.
너무 많은 물이 계속 틀어져 나오는 걸 보고 느꼈죠.
'아, 그동안 내가 불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이런 생각과 마음 가짐을 가지게 해 준 바다가 참 고맙네요.
그리고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떠날 것 같아요.
제가 감사하게도 느꼈던 큰 감상을 조금 나누고 싶어 항해 도중 남겼던 짧은 기록을 나눕니다.
여러분도 바다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기필코 붉게 타오르는 태양.
언제그랬냐듯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구름들.
아침 해를 기다려 본 것이 얼마만일까.
달 빛 아래 노래를 불러 본 것이 얼마만일까
동이 트는 순간, 요트 콕핏에 앉아있었다.
그 속에 여유롭게 시를 쓰고,
바람의 변화에 미소를 짓는 뱃사람이 보였다.
물 없이도,
핸드폰 없이도,
그대가 없이도 온전히 평온히 살아가는 '내'가 보였다.
처음엔 바람이 느껴졌다.
가슴을 뚫을 듯 강렬히 불어오는 태평양의 바람.
세일을 펄럭였다가 당겼다가 끊임없이 방망이 질을 해대는 북풍.
더운 몸을 식혀주는 서늘한 해 질 녘의 바람.
불침번 내 눈물을 흩뿌려주는 밤바람.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다음은 달그림자가 보였다.
올려다보니 내 마음 네 눈동자보다 밝은 저녁 달빛.
바람은 그 달빛을 물감 삼아 온 바다에 판화를 찍었다.
선명한 세일의 달그림자.
초승달의 눈썹같이 각인된 하얀 파도의 곡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거대한 궁전이 펼쳐졌다.
그다음은 바닷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넘실 걸리는 파도. 요트 옆에서 부서지는 파도.
다시 피어오르는 탄산수 같은 파도.
꾸륵꾸륵 물속 러더와 부딪혀 으스러지는 물살.
촥촥 요트와 시트가 만드는 마찰음.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는 갈매기의 날갯짓.
바다 위 60여 가지의 소리는 오케스트라가 되고,
난 온 몸을 감동에 맡긴 현이 된다.
우선 휴대폰이 쓸모가 없어졌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으니 이건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저녁을 밝히던 전기 불빛도 사라졌다.
전등은 태양이 되었고, 가로등은 달빛이 되었다.
물이 사라졌다.
하루에 바닷물 다섯 바가지, 민물 한 바가지만 있으면 온 몸을 깨끗이 씻는다.
양치는 하루에 한 번,
더 이상 탈 수 없을 만큼 태양에 검게 탄 피부는 선크림을 대신한다.
시계를 보지 않게 되었다.
동이 트고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고,
바닷물에 밥그릇을 씻고 나면 오전에만 나오는 그늘을 즐겼다.
오후 뜨거운 태양 아래 책을 읽다 보면 해가 기울었고, 우리는 다시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 밥그릇을 씻을 때 즘이면 하늘이 조금씩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덮을 때면
우리는 말없이 위스키 한 잔, 콜라 한 캔을 나눠마셨다.
다시 길고 긴 밤이 시작될 참이었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콕픽으로 올라와 달빛을 즐겼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크루들의 뒷모습이 보였다가 또다시 한 명씩 사라졌다.
영원의 시간이 펼쳐지는 듯한 불침번이 끝날 때 즘
다시 벅찬 새벽이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공(空)으로 걸어갔던 시간이었다.
익숙한 동네 작은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도 제가 그런 큰 모험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참방참방 떠오르는 바다의 향기.
기필코 붉게 타오르던 태양.
환상적이었던 노을의 변주곡이 귓가에 맴돕니다.
요트라고 하면 흔히들 럭셔리 스포츠라고 말하는데요.
동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바람의 힘만으로 나아가는 세일 요트는
극단적일 만큼의 순수한 대자연의 경험입니다.
실제로 일본 히피 친구들에게 전기도, 인터넷도 없었던 제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니,
자기들보다 더한 히피가 여기에 있다며 엄지를 지켜 세우더군요.
큰 여행 뒤에 다시 바쁜 일상에 종종걸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가슴 가득히 들어온 바닷소리를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향기를 맡았으면 좋겠네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으로 말이죠.
여행작가 최재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