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원 Jul 12. 2017

2017년 6월생 쌍둥이

공기처럼 가볍고 믿을 수 없이 못생긴

선명하게 찍혀있는 2017년 6월산 AirPods.
애플공홈에서 주문할 경우 6주 걸린대서 일명 '6주팟'이라고도 불리우죠. A store에 입고되면 바로 알림 달라고 번호를 남겨놓은 지 4일만에 들려온 입고소식에 바로 달려갔...


직접 써보기 전엔 그 가치가 잘 상상이 안되어 시큰둥 해지는 종류의 물건들을 종종 만난다. 내가 이걸 처음 만난 건, 회사에서 샘플로 구매한 에어팟이 입고된 한 달 전쯤이다. 그때만 해도 수영장에 입장하는 박태환 선수처럼 내가 음악을 끼고 사는 스타일도 아닌데다가 아무래도 쪼꼬미 샤워기 같은 저 우스꽝스런 물건을 내 귀에 꽂고 다닐 순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뭐 이왕 에어팟을 거저 써 볼 기회가 생긴 거, 나도 일일체험 해볼까하고 시작한 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대략 2주일이 되고 나니 어느 새 조만간 난 이걸 구매하고 말겠다는 강력한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걸 쓰고 있으면 꽤 많은 사람들이 물어본다. 귀에서 빠지거나 하면 어떡하냐고. 사람들의 막연한 느낌적 두려움과는 달리 '어머, 이거 지금 빠지려고 하네, 위태위태한 걸' 하는 순간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이어폰이 귀에서 탈락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오히려 그 '줄'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줄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또는 줄이 어딘가에 걸려서.

그 다음으로는 사용자경험 측면에서, 유선이어폰 또는 양쪽 유닛이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있는 (핸펀과는 BT무선 연결이지만, 오른쪽 왼쪽은 유선으로 연결된 불완전무선) 이어폰에 비해 많이 좋으냐고 묻는다. 물론이다. 뭐가 좋은지 읊어보라 요구한다면 상대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만큼 조리있게 말할 자신은 없다. 대신...이걸 며칠 써보다가 유선을 쓰게 되면 지난 몇 십년 간 우리가 얼마나 번거롭고 짜증나는 과정을 감수하며 음악을 들어왔는지 몸에서 사리가 안나오는 게 신기하구나 싶어진다. 에어팟은 이제까지 내가 써 본 모든 청음장비 중 가장 seamless한 사용경험을 제공한다. 음악 좀 듣자고 뒤엉킨 줄을 탈탈 털어가며 정리해야한다거나 양쪽 귀에 걸고 나서 아직 채 덜마른 머리카락을 목덜미의 선 위로 빼 내야 한다거나 간혹 회전의자 바퀴에 씹혀버린 전선을 구출해내야 한다거나 하는, 그 제품을 쓰기 위해 겪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기는 걸리적거리는 절차가 없고, 물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착용과정과 음악에 접근하기까지 걸리는 짧은 시간, 버튼 하나 없이도 조작가능한 재생/정지/전화수신/종료가 압권이다. 또한 장시간 착용해도 목에 걸리는 하중이 없고 착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거울보기 전까진 내가 이걸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지 못한다. 공기처럼.
 
이 모든 사용경험의 자연스러움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 바로...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 생김새인데 난 여전히 이 점에선 점수를 박하게 줄 수 밖에 없다. 에어팟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첫째는 AUX홀이 아이폰에서 사라진 점 때문에 둘째는 유선 이어팟에서 선만 댕강 잘라낸 듯한 그 생김새 때문에 욕을 엄청 먹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난 AUX홀이 살아있든 말든엔 관심도 없다. 어차피 안쓰니까. 유선 이어팟 줄과 매 순간 사투를 벌이느라 내 노동력과 시간을 허비하느니 안듣고 마니까.

세상엔 여러 종류의 디자이너가 있는데 난, 아름다운 조형과 소재로 외관을 다듬는데는 크게 흥미가 없다. 그보단 나는, 어떤 제품의 혁신포인트를 직관에 기반해 발굴하고 그 포인트에 딱 부합하는 절묘한 조형을 찾아내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는 디자이너이다. 새로 창작해낸 조형이 그렇게 생길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갖췄을때 쾌감을 느끼는 입장에서 보면, 저 쪼꼬미 샤워기같은 생김새는 유선 이어팟 시절 전선이 지나가는 통로로서의 적절한 조형이었지, 무선 이어폰에게는 필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당위성은 됐고 착용시 이쁘기라도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측면 착용샷은 봐줄만한데 사용자 얼굴 정면에서 보면 누가 껴도-특히 귀가 앞쪽을 보고 있는 얼굴형-귀에서 하얀 촉수가 자라는 외계 종족같은 게 좀 웃기다. 애플의 시그니처? 헤리티지? 아이덴티티? 뭐가 됐든 애플의 선택이 그러하다니 내가 뭐라할 건 아니지만, DOP(display only phone), full touch phone의 시대에 블랙베리사가 QWERTY자판을 자사의 아이덴티티라며 고집하는 것과 진배없어 뵈는 맥락이라는 게 나의 소견이다.

이러이러한 연유로 2세대엔 좀 납득할만한 외관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구매당일까지도 내적 갈등을 겪었으나, 내 소비역사상, 사용경험이 주는 가치가 도저히 마음에 차지 않는 외관 디자인을 이긴, 거의 첫 사례가 아닐까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