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 본질 보호 원칙과 교사의 판단적 전문성에 관한 탐구
교육이 먼저인가, 기술이 먼저인가.
이 질문은 묻는 순간 답이 나온다. 교육이 먼저다. 목적이 수단에 앞서야 한다는 것은 교육학의 기본 전제이고, 상식의 영역이다. 나는 교육공학을 학부부터 박사까지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 명제를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교육공학은 교육을 위한 기술의 학문이지, 기술을 위한 교육의 학문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학교 현장을 들여다보면, 컨설팅으로 교육기관을 만나다 보면, 그 명확한 명제가 자꾸 흔들리는 지점들이 있다. 물론 명제가 흔들린다는 것은 어떠한 악의적인 방식이라는게 아니다. 더 좋은 교육을 위한 최선의 노력 속에서 물음표를 만나는 지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선형적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처럼 교육이 먼저죠가 아니라 그 판단이 아주 모호한 복잡한 고민의 시점을 꽤 빈번하게 마주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교육과 기술의 균형에 경계선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이 먼저라는 원칙을 다시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원칙이 AI 시대의 복잡한 현장 속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동해야 하는지, 그 실천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다. 원칙을 아는 것과 원칙을 구현하는 것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나는 그 거리를 좁히고 싶다.
이 글은 현장 교사를 위한 것이다. 동시에 예비교사를 양성하는 교원교육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AI 교육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교육행정가들에게도 닿기를 바란다. 이 글에서 나는 교과 본질 보호 원칙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이를 교사의 수업 전문성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원칙을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량 프레임과 훈련 활동들을 함께 제안하려 한다.
교육공학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질문과의 반복된 씨름이다. 라디오가 등장했을 때, 텔레비전이 교실에 들어왔을 때, 컴퓨터가 보급되었을 때, 인터넷이 학습의 지형을 바꿨을 때 — 매번 새로운 기술이 교육의 문 앞에 서면 교육계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이것을 어떻게 수업에 쓸 것인가?"
문제는 이 질문의 출발점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기술이 등장하면 교육계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수업에 통합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그 압력의 출처는 다양하다. 정책, 예산, 연수, 평가 지표, 학부모의 기대, 사회적 분위기. 그 결과, 교육관계자들은 종종 "이 기술이 이 수업에 왜 필요한가"를 묻기 이전에 "이 기술을 이 수업에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물론 최근의 기술 발전과 교육기술의 보급은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고민하게 하고 있다. 더 많은 기술이 등장하니 고민이 더 깊어지고 있다.)
AI의 등장은 이 문제를 훨씬 더 복잡하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전의 기술들 — PPT, 동영상, LMS — 은 기본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거나 관리하는 도구였다. 학습의 핵심 과정, 즉 학생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경험하는 부분은 여전히 학생의 것이었다(그렇기에 내가 수행했던 연구들도 어떻게 하면 온라인 콘텐츠를 더 의미있게 설계하는가? 운영하는가? 등이었다.). AI는 다르다. AI는 그 핵심 과정 자체에 개입할 수 있다. 학생이 쓰는 글을 대신 써줄 수 있고, 학생이 풀어야 할 문제를 풀어줄 수 있으며, 학생이 설계해야 할 실험을 설계해줄 수 있다.
이것이 AI를 이전의 교육기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에 세운다. 그리고 이것이 교육이 먼저라는 원칙이 선언만으로는 부족한 이유다. 어디까지가 AI가 할 수 있는 영역이고, 어디서부터가 학생이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경험해야 하는 영역인지를 교사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이 바로 교과의 본질이다.
나는 교육기술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다. AI를 교실에서 추방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과마다, 수업마다, 학생의 발달 단계마다 AI가 개입할 수 있는 정도와 방식이 다르다는 것, 그 차이를 판단하는 것이 교사의 전문적 역할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교육이 먼저라는 명제는 선언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이 수업 설계의 구체적인 결정 원칙으로 살아 숨쉬어야 한다.
나는 교육에서 기술의 역할을 이야기할때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자주 인용한다. 교육공학을 전공한 개인의 주장이 아닌 공교육의 방향인 개정 교육과정을 가지고 설명할때 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공감을 높일 수 있기에.. 그 중 내가 가장 인용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과의 깊이 있는 학습에 기반이 되는 언어/수리/디지털 기초소양을 모든 교과를 통해 함양할 수 있도록 수업을 설계한다.
이 부분은 디지털 소양의 범교과적 함양을 설명한다. 이전 교육과정에서 정보 관련 역량은 주로 정보 교과와 컴퓨터 관련 수업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2022 개정교육과정은 이를 모든 교과에서 함양해야 할 기초 소양으로 명시했다.
이것은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방향이다. 디지털 역량이 특정 교과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교과 학습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타당하다. 국어 시간에 디지털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고, 수학 시간에 데이터를 시각화하며, 사회 시간에 디지털 매체의 정보를 분석하는 것은 충분히 교과의 목표와 연결될 수 있다.
문제는 이 방향성이 현장에서 어떻게 수용되는가 하는 것이다(교육공학 전공자인 나는 이 것을 교사의 디지털 역량 함양의 근거로 설명한다).
디지털 소양의 범교과적 함양이라는 정책 언어는 현장에서 종종 "모든 수업에 디지털 도구를 써야 한다"는 압력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교육청의 연수는 AI 도구 활용 방법을 가르치고, 수업 나눔에서는 태블릿과 AI 플랫폼을 활용한 수업이 좋은 수업의 예시로 제시된다.
여기서 미묘하지만 중요한 뒤틀림이 발생한다. 디지털 소양을 함양하는 것과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 것은 다르다. 디지털 소양에는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 AI 생성 결과물을 검토하고 평가하는 능력,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윤리적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등이 포함된다. 반드시 AI 도구를 활용하는 수업을 해야만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책 언어와 현장 실천 사이의 이 간극은 채워지지 않은 채, 교사들은 모든 수업에서 AI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을 안게 될 수 있다.
2025년 11월 발표된 "AI for All : 모두를 위한 AI 인재양성방안" 정책에서도 관련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초등 실과나 중고교 정보 교과 외에도, 수업에서 AI 교육자료를 활용하면서 AI 기본소양을 쌓는 기회 제공
2022 개정 교육과정처럼 모든 교과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수업에서 AI 교육자료를 활용하면서 학생의 AI 기본소양 함양을 촉진한다는 방향은, 잘못 해석될 경우 모든 교과 교사가 AI 전문가이자 AI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읽힐 수 있다. 음악 교사가 AI 작곡 도구를 가르치고, 체육 교사가 AI 스포츠 분석 플랫폼을 활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기준 없이 정책이 현장에 내려오면, 앞서 말한 교육과 기술의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위한 경계선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본문에서 언급한 2022 개정 교육과정의 문구와 AI for All : 모두를 위한 AI 인재양성방안 정책에서의 수업에서 AI 교육자료를 활용하면서 AI 기본 소양을 쌓는다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내가 예비교사 및 현장교사들을 위한 강의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두 내용이 담고 있는 미래 교육의 방향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이기에 이 구분들을 시작점으로 해서 교육을 기술의 활용을 단순히 선포적으로 "교육이 먼저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더 실제적인 반영으로 "교육에서 의미있는 기술 활용을 위한 방안으로 교과의 본질을 지켜야한다는 메시지와 그런 의사결정의 전문가로서 교사의 역할과 역량을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