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7년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 했던 이야기

<왕과 사는 남자> (2026)

by 재이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계유정난이 조선을 뒤흔들고
어린 왕 이홍위는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오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대감을 우리 광천골로 오게 해야지.

한편,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는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촌장이 부푼 꿈으로 맞이한 이는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였다.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그의 모든 일상을 감시해야만 하는 촌장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이홍위가 점점 신경 쓰이는데…


1457년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 했던 이야기


오랜만에 사극 영화 한 편이 극장에 걸렸다.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 자체에도 관심을 두던 사람이기에 이번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감독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이었던 시사회 감상평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게 되었다.


영화는 관객이 실제 역사에 대해 모르고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준다. 그러나 전체적인 배경 지식을 가지고 본다면 이 작품을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된다.

여태껏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알려졌던 조선 제6대 왕 '단종'과 제7대 왕 '세조'를 다룬 작품이다.

제4대 왕인 세종은 자신의 장남을 왕세자로 삼았고, 자연스럽게 제5대 왕 '문종'으로 왕위에 오른다. 문종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해 훗날 어진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즉위 후 2년만에 훙서하면서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이홍위'이다. 그는 유일하게 적장손(적장자의 아들)으로 태어난 국왕으로, 조선 왕조 역대 국왕 중 숙종과 함께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졌다.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은 '한명회'라는 일종의 '책사'를 두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인 '이홍위'를 폐위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제거하며 왕위를 찬탈해, 조선 역사에 기록된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아쉬운 점은 "준비하던 거사가 내부 세력에 의해 유출되었다"라는 사실을 그려낼 때 이 작품이 택한 방법은 단순했다. 거사를 도모하는 한 집단의 대화를 다른 이가 창호지 문 밖에서 대놓고 엿듣는 것으로 연출했다. 또한,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니만큼 다른 것들보다 주요 인물들의 서사나 마을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보여주었더라면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정의 전달이 훨씬 잘 되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영화의 시작은 고문을 받고 있는 사육신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가 고문을 당하게 된 신하들의 비명을 들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 상왕 '이홍위'.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왕을 멋대로 폐위시키며 스스로 왕위에 오른 '세조'을 인정할 수 없었던 사육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에게 저항했으나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가진 노산군을 제거해야 깔끔해졌기에 세조의 오른팔인 한명회는 그마저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계유정난 이후 백성들의 민심이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기에 일단 노산군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킨다.

한편, 노루골에 유배된 고관대작 덕에 마을 사람들이 부유해졌다는 소문을 들은 광천골 호장 엄흥도는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마을로 데려오려 한다. 그렇게 노산군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고, 엄흥도는 보수주인이 되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된다.

엄흥도는 그저 권력에 엎드린 채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걱정 없이 살아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한명회의 잔인한 면을 안 이후 옳은 일을 할 것이라 믿은 '이홍위'를 돕기로 한다. 유배 온 노산군과 서로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할수록 '이홍위'에 대해 알아갔으며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왕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느끼게 한 '이홍위'를 돕기 위해 엄흥도는 한명회의 뜻을 거슬렀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세조와 한명회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굴욕만은 피하고 싶었던 '이홍위'는 엄흥도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것은 바로 '후에 때가 되면 부디 그대(엄흥도) 손으로 직접 강을 건너게 해달라.'였다.

관아에서 들을까 전전긍긍하며 '이홍위'를 왕, 전하로 부르지 않았던 엄흥도였지만 이홍위가 한명회에 맞서겠다고 선언한 후로는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이홍위를 전하라 불렀다. 엄흥도는 시체를 거두지 말라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이홍위의 시체를 거두어 장을 치르고 묘를 만들며 예를 갖추었다. 훗날 둘의 위패는 나란히 걸려 죽어서도 함께 있게 되었고, 엄흥도는 끝까지 왕과 사는 남자로 남게 되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 <연려실기술> 제4권 '병자록'


노산이 해를 입자, 명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 되어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능)의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이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 하고 도로 묻었다.

- <연려실기술> 제4권 '야성잡설', '축수록'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때 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매 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하였다.

- <연려실기술> 제4권 '영남야언', '병자록'


무인년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청하였으므로 추복(追復)이 있었는데, 임금이 이미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묻고, 또 종친(宗親)과 문무(文武)의 대소 관리 4백 90여 인을 소집하여 정의(庭議)하게 하였더니, 그 의논에 이동(異同)이 없지도 않았지만, 성상이 그 구련(拘攣)을 초월한 식견으로 단행하여 의심치 않으매, 여러 신하들이 공경함을 명명(明命)같이 하여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대왕의 시호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며,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왕후의 시호는 ‘정순(定順)’이라하고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며,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 <단종실록> 부록


'역사가 스포'라고 불리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저 아쉬움이 없지 않아 있었던 작품이다. 가장 크게 기대했던, 사전 시사회 등에서 언급되었던 이홍위와 엄흥도의 후반 서사조차 크게 와닿지 않았다. 또한, 마을과 관련된 서사가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져서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이홍위와 엄흥도의 서서가 그저 '갑작스러운 우정'으로만 보여졌다.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사실에 각색을 더해 완성된 영화이다. 단종(노산군, 이홍위)과 엄흥도, 금성대군, 한명회 등 조선 역사 속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정사와 야사를 각색한 점은 흥미롭다. 실제 역사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면 정사만을 다루는 게 보통인데, 이 작품은 정사와 야사를 바탕으로 각색했다는 점에서, 정말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던 역사를 다룬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