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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윤 Jun 07. 2023

다사다난했던 투자를 마무리하며

감정을 다스리는 자가 승리한다.

우리 회사는 올해 2월에 90억 규모의 시리즈 A 투자 유치를 마무리하였다. 암호화폐 투자 광풍이 불던 작년 2월부터 IR(Investor Relations;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기업 설명 및 홍보를 하는 활동)을 시작했었는데, 5월에 발생한 테라 사태를 시작으로 FTX, Celsius, Voyager Digital, Blockfi 등 안 좋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며 시장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됐고, 3개월로 계획했던 IR을 자그마치 1년이나 하게 되었다. 보통 이 정도로 길어지게 되면 투자를 못 받는다고들 하던데 다행히도 우리를 지지해 주신 투자자분들 덕분에 기적적으로 투자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투자 유치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써 두었던 기록을 공개하려 한다.


투자받으면 무슨 기분이에요?


투자를 유치하고 나서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는데, 많은 분들이 특히 궁금해하시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투자받으면 무슨 기분이에요?" 아무래도 투자 유치에 성공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지는 않다 보니 많이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았고, 나 역시도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궁금했다. 하지만 길고 길었던 IR 때문인지 계약서에 날인을 하고 법인 통장에 모든 금액이 납입된 것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더 이상 IR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었다. 마치 수능을 치고 나서 더 이상 수능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해방감을 맛본 것과 비슷하달까?


왜 기쁨이나 성취의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나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시장 상황과 투자사 내부의 정치 상황이 그랬다. 만약 투자 마무리가 한두 달만 더 늦어졌더라면 SVB(Silicon Valley Bank)의 파산과 chatGPT의 등장으로 투자를 못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또한, 현재의 투자사와 투자심사역님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투자 라운드를 1년 가까이 끌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투자를 마무리하고 세 달이 지난 지금, IR을 하던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나는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스트레스와 함께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었던 기억이 난다. 힘겹게 IR을 도는 초기 단계의 많은 창업자들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데,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을 가장 많이 느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당연하고 확실하게 보이는 우리 회사의 미래를 투자자들이 쉽사리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 편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투자자들이 막상 딜이 구체화되면 돌변하여 "우리 편이 되겠다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갖 구실로 기업 가치를 깎고 유리한 딜을 가져가려는 모습에 인류애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투자자에 대한 분노는 창업자에게 굉장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사진: 슈퍼펌프드)


그 당시에는 나의 편이 되겠다면서 나의 소중한 시간을 뺏고 계속해서 협상을 하는 투자자들이 미웠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들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성숙하고 프로페셔널했었더라면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이 원하는 걸 주고 내가 원하는 걸 빠르게 취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IR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해 버렸고, 그 때문에 회사 내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 부채를 남겨버렸다. IR이 끝나고 나서야 그 부채들을 청산하느라 많은 시간과 비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상처들을 남기게 되었다.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회사 내부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IR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창업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물론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의 경쟁 기업이 500억 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아 투자를 받았다면 그보다 낮은 기업가치로는 투자를 받고 싶지 않겠지만 꾹 참고 투자를 빠르게 마무리해서 상대를 기업 가치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또한, 투자자가 내 말을 믿어주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헛소리를 하더라도 투자자가 멍청해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으면 안 된다. 그보다는 계속해서 IR자료를 수정하면서 설득력을 높이고 팀 내부 및 시장에서도 먹힐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투자자 탓은 할 수 있지만 시장 탓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투자 라운드를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레퍼런스 체크를 당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안 좋은 소문이나 모함 등을 당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소문이나 모함 때문에 투자자들이 변덕을 부릴 수도 있다. 물론 굉장히 억울하고 화가 나겠지만 투자 라운드를 잘 마무리하는 게 최우선 목표라는 것을 명심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우리 회사의 기업가치와 투자자가 생각하는 기업가치가 서로 다른 경우에도 협상 과정에서 감정이 상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특히 당사자가 아닌 외부 사람에게 상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다시 안 좋은 소문이나 모함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IR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창업자의 시간은 본인만의 것이 아니라 회사와 팀원들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투자를 받고 싶은 투자자들을 전략적으로 나열한 뒤에 주어진 시간 안에 빠르게 만나서 IR을 하고 투자자를 구성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 어떤 VC가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무작정 많은 VC들을 만났었고, 결과적으로 나의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해 버렸다. IR을 시작하기 전에 VC 생태계를 잘 이해하고 VC들의 만나자는 제안을 적절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부채를 남기지 않고 IR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IR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행위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때로는 투자를 받을 때 IR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만약 투자자가 해당 섹터에 투자를 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고 접근했거나, 투자사 내에서 가장 정치력이 높은 인물이 딜을 맡게 되었다면 IR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때로는 정치력이 높은 인물이나 투자사를 찾아다니는 게 IR에 집중하는 것보다 투자를 잘 받는 방법일 수도 있다. 반대로, 정치력이 낮은 인물이 딜을 맡게 되거나 투자사 내외부의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다면 IR을 아무리 잘해도 딜이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결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다른 플랜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위와 같은 것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현재보다 더 큰 기업가치로 더 빠르게 투자를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테라나 FTX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객기를 부리다가 IR에 시간을 1년이나 쓰게 되었다. 물론 IR을 1년 동안 한 것이 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IR 자료를 계속해서 수정하면서 내용을 수백 번 얘기하고 다녔기 때문에 회사의 미션과 비전, 그리고 로드맵이 훨씬 단단해졌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IR은 빠르게 끝내는 게 훨씬 좋은 것 같고, 다음 라운드는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빠르게 끝낼 계획이다.


아마도 이 글을 보가 초보 창업자가 IR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빈 부분이 많을 텐데,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IR을 빠르게 끝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더라도 실수를 훨씬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투자자들도 항상 IR을 신속하게 끝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창업자 입장에서는 투자자를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같은 창업자인 내가 쓰는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모쪼록 나의 부족한 글이 많은 초기 창업자들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또 다음 라운드 투자를 받고 새로운 인사이트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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