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나에게는 ‘그해의 노래’가 있다. 몇 번을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고, 멜로디만 흘러나와도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곡. 가사 또한 한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슬픔과 다정함, 불안과 위로가 균형 있게 얹혀 있어 오래 들어도 과하지 않은 노래. 인스트루멘털만 흘러도 공기가 바뀌는 곡들이 있다. 그런 노래는 한두 곡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나의 베스트셀링처럼 남아 있던 곡은 백예린의 0310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감, 무심한 듯 솔직한 가사, 과장되지 않은 감정선이 좋았다. 유난히 애쓰지 않아도 마음에 스며드는 노래였고, 그래서 오래 곁에 두고 들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플레이리스트에 쉽게 빠지지 않는 노래 하나가 들어왔다. 처음엔 멜로디에 이끌렸고, 듣다 보니 가사가 자꾸 곱씹혔다. 독특하지만 과장되지 않았고, 담담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여러 번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리듬과 문장들. 오랜만에 “아, 이 노래다” 싶은 감각을 느꼈다. 바로 한로로의 0+0이다. 요즘 이 노래를 참 좋게 듣고 있다. 그 안에 담긴 매력적인 가사들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되었고, 어쩌면 조금은 감성적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꺼내보게 되었다. 이 글은 그 노래에서 시작된 기록이다.
성공한 뒤에야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조금 더 안정되면, 조금 더 준비되면, 그때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다짐. 우리는 늘 ‘완성된 나’가 된 다음에야 사랑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아직 부족하고, 아직은 증명할 게 많고, 아직은 보여줄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래서 시작을 자꾸 미룬다.
하지만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0이었던 시절이 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고, 가진 것도 부족했고, 확신도 없던 시간. 지금 생각하면 서툴고 어설펐던 그때가 분명 존재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워한다. 그때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 있었다. 조건이 아니라 가능성을 봐준 사람. 결과가 아니라 태도를 믿어준 사람.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흔들리던 나를 그대로 두어준 사람.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건, 그 시절의 나 역시 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스스로를 믿어보려 했던 순간들.
생각해보면 가장 소중한 가치들은 완성된 이후가 아니라, 불안정한 시절에 만들어졌다. 무언가를 이루고 난 다음의 자부심보다,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붙잡고 있었던 작은 마음들이 더 오래 남는다. 불안했기 때문에 더 간절했고, 부족했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느꼈고,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더 솔직했다.
우리는 1이 된 뒤에야 시작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작은 늘 0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0의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완성되기 전의 나, 준비되지 않은 채로 관계를 맺던 나, 서툴게 사랑하고 서툴게 버텼던 나. 그 모든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지금의 단단함이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건, 완성된 뒤의 내가 아니라 0인 채로도 시작했던 나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0에서 출발했고, 그 시절의 불안정 속에서 가장 귀한 가치들을 배워왔다.
우리는 모두 제철이 아니다. 늘 어딘가 타이밍이 어긋나 있다. 누군가는 너무 이르게 시작했고, 누군가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남들보다 빨리 앞서가면 조급하다는 말을 듣고, 조금 뒤처지면 준비가 덜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준은 늘 바깥에 있고, 우리는 그 기준에 맞추느라 자꾸만 자신을 고쳐 쓰려 한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정확한 계절표를 따르지 않는다. 여름에 코코아를 마시고 싶은 날이 있고, 겨울에 수박을 떠올리는 순간이 있다. 어울리지 않는 선택 같지만, 그 마음은 분명 진짜다. 우리는 종종 그 진짜를 숨기며 살아간다. 괜히 눈에 띌까 봐, 이상해 보일까 봐, 설명해야 할까 봐.
어긋났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흔하지 않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답을 맞히는 데 익숙해지려 하고, 평균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평균이 나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를 가장 또렷하게 만드는 건 남들과 살짝 다른 지점들이다.
중요한 건 그 어긋남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부끄러워하며 지우려 할지, 아니면 조용히 끌어안고 내 것으로 만들지. 계절에 맞지 않는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남들 기준에서 조금 벗어난 선택을 스스로 승인해주는 것. 그 태도가 결국 나를 만든다.
어쩌면 성숙은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 아니라, 어긋난 자신을 인정하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제철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힘. 그 힘이 쌓일수록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우리는 성장을 채워짐으로 이해한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 빈칸을 메우는 일이 곧 발전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부족함이 보일 때마다 서둘러 무언가를 덧붙이려 한다. 자격증을 더 따고, 성과를 더 쌓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를 지탱해온 건 늘 ‘추가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던 것’이었다. 흔들리던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일, 서툴러도 계속 붙잡고 있던 관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던 마음. 채워서 커진 게 아니라, 버리지 않아서 이어진 시간들. 관계도 그렇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지, 더 나은 환경을 찾으면 되지. 물론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개선과 교체의 논리로만 움직일 수는 없다. 때로는 조금 부족하고, 조금 어설프더라도 그대로 두는 선택이 필요하다.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함께 흔들리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것.
0과 0이 만나도 여전히 0일 수 있다.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만남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누군가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주는 것, 그리고 나 역시 쉽게 등을 돌리지 않는 것. 그 단순한 태도가 관계를 이어 붙인다. 어쩌면 성장은 더해지는 속도보다, 버티는 시간과 닮아 있다. 무언가를 얻는 능력보다, 끝까지 남아 있는 힘. 불안정한 나를 버리지 않는 태도, 완벽하지 않은 상대를 급하게 정리하지 않는 마음. 그렇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 결국 우리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이상적인 ‘우리’는 늘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 더 성공한 우리, 더 안정된 우리, 덜 흔들리고 더 단단해진 모습이 되어야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나를 자꾸 유예한다. 아직은 준비 중이라고, 아직은 미완이라고, 조금만 더 나아지면 그때 사랑도 관계도 제대로 시작하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저 너머의 우리는 결국 환상에 가깝다. 한 단계를 넘어서면 또 다른 부족함이 보이고, 하나의 불안을 해결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긴다.
완성된 상태는 도착점처럼 보이지만, 막상 다가가면 또 다른 출발선일 뿐이다. 우리는 늘 어딘가 모자라고, 늘 조금은 불안정한 채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더 나은 버전의 나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완벽해진 뒤에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상태로도 충분히 관계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저 너머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를 붙드는 순간, 삶은 더 이상 유예되지 않고 비로소 현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