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디자인을 직무가 아닌 산업으로 다시 보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둘러싼 불안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AI가 등장하고, 자동화가 가속되면서 “디자이너는 사라질 직업인가”라는 질문은 반복해서 등장해왔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가 사라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디자이너가 남느냐의 문제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디자이너의 역할은 비교적 명확했다. 툴을 잘 다루고, 시각적으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경쟁력을 가졌다. 포트폴리오는 곧 실력이었고, 실력은 결과물로 증명되었다. 이 구조는 오랫동안 작동했고,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 기준에 맞춰 성장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AI는 시각적 산출물을 누구나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디자인의 생산 과정은 더 이상 디자이너만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이 변화 앞에서 기존의 기준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려는 시도는 많지만, 산업이 요구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글은 ‘AI 시대에 디자이너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조언을 하려는 글이 아니다. 디자인을 직무가 아닌 산업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고, 기업과 조직 안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짚어보려 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디자이너가 어떤 태도와 책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툴이나 더 화려한 포트폴리오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기술을 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사고다.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불과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시각 디자이너의 실력은 비교적 단순한 기준으로 판단되었다. 어떤 툴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다루는지가 곧 실력이었고, 포토샵·일러스트·인디자인 같은 도구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가 평가의 핵심이었다. 다시 말해, 시각화를 얼마나 전문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가가 디자이너의 역량을 판가름하던 시대였다. 그 기준은 명확했고, 당시 산업 구조 안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전제가 거의 무의미해졌다. AI는 디자이너가 2~3시간 걸려 완성하던 작업을 2~3분 만에 얼추 끝내버리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시각적 결과물의 생산 속도와 효율은 이미 인간 디자이너의 경쟁 영역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더 이상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디자이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질문에 머무르는 순간, 디자이너는 AI와 직접 경쟁하는 위치로 밀려난다.
이제 AI가 많은 것을 대체하는 시대에 디자이너는 다른 질문을 받는다. “너는 디자인이라는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이전보다 더 해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결과물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산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비즈니스 맥락 속에서 디자인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반복되는 문제를 어떤 규칙과 체계로 정리할 수 있는지까지 포함한다. 다시 말해, 디자인 역량을 통해 어떤 문제를 풀고, 그것이 회사에 어떻게 기여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변화 속에서 단순히 시키는 일을 받아 처리하는 디자이너는 빠르게 한계를 맞는다. 그런 역할은 이미 GPT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 사고하고 문제를 정의하며, 프로세스를 제안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자연스럽게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GPT는 요청받은 일을 해결해줄 수는 있지만, 조직 안에서 자발적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구조를 제안하지는 않는다. 그 차이가 지금 디자이너의 생존선을 가른다.
결국 한 조직 안에서 디자이너의 포지션은 더 이상 고정된 ‘토템’ 같은 존재가 아니다. 특정 영역에 묶여 있는 역할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이동하며 산업과 비즈니스 구조에 개입하는 존재로 변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2010년대와는 전혀 다른 디자이너 생태계다.
지금까지 디자인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선은 여전히 직무 중심에 머물러 있다. 디자이너는 시각을 담당하고, 기획자는 기획을 하고, 개발자는 개발을 한다는 식의 구분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이미 산업의 실제 작동 방식과는 맞지 않는다. 디자인은 더 이상 독립된 직무가 아니라, 산업 안에서 다른 요소들과 맞물려 작동하는 하나의 기술이자 언어에 가깝다.
산업의 관점에서 디자인은 결과물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연결하는 장치다. 어떤 상품을 만들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서비스를 확장할 것인지, 어떤 고객 경험을 우선시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디자인을 통해 드러난다. 이때 디자인은 장식이나 마무리 단계가 아니라, 기획·기술·비즈니스 사이를 연결하며 구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산업 안에서 디자인이 작동한다는 것은, 곧 디자인이 문제 해결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AI의 등장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AI는 시각화 산출물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워터폴 프로세스를 밟지 않는다. 기획, 스케치, 수정, 보완이라는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의 드로잉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빠르다’는 차원이 아니라, 구조를 압축해 곧바로 결과로 도달하는 전혀 다른 속도의 모델이다. 과거에는 구현 비용과 시간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시각적 아이디어들이, 지금은 거의 즉시 형태로 검증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디자인의 역할은 다시 바뀐다. 시각화를 잘 만드는 능력 자체는 더 이상 핵심 경쟁력이 되기 어렵다. 대신 중요한 것은 무엇을 검증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검증 결과를 어떻게 판단하고 제안으로 연결할 것인가다. AI를 활용하면 수많은 가설을 빠르게 시각화하고 비교하며 버릴 수 있다. 즉, 디자인은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검증을 반복하고 방향을 좁혀가는 과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래서 산업 안에서의 디자이너는 단순한 제작자가 아니라, 판단자에 가깝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고, 그 질문을 어떤 기준으로 해석할지 결정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산업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각화만 하는 디자이너는 이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 반대로 비즈니스 구조와 기술 흐름을 이해하는 디자이너는, AI가 만들어낸 시각적 결과를 활용해 더 빠르고 논리적인 제안을 만들어낸다.
결국 디자인을 직무로만 인식하는 순간, 디자이너의 역할은 빠르게 축소된다. 하지만 디자인을 산업 안에서 작동하는 기술로 이해하는 순간, 디자이너는 조직의 중심부로 이동한다. 이들은 화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복잡한 산업 구조를 해석하고 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 필요한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산업을 읽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기업이 안정적일 때는 다양한 역할이 공존할 수 있다. 실험적인 포지션도 유지되고, 효율이 다소 낮아도 당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이 위태해지는 순간 상황은 급격히 달라진다.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기업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판단한다. 이때 가장 먼저 검토되는 기준은 단순하다. 이 역할은 외주나 용역으로 대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간단하게 외주 용역으로 대체 가능한 범위의 전문가들이 우선 정리 대상에 오른다. 디자인 직군, 마케팅 직군, 개발자 직군이 이 리스트에 포함될 확률이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생태계 전반에 수많은 에이전시와 외주 조직이 존재하고, 특정 업무 단위는 비교적 쉽게 분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인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는가다.
이 지점에서 시각적인 산출물만 다루는 디자이너는 구조적으로 불리해진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외주로도 가능하고, AI로도 빠르게 대체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비용과 속도를 따질 수밖에 없고, 결국 ‘대체 가능한 역할’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이건 개인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기업 구조 안에서의 위치 문제다.
반대로 기업이 끝까지 붙잡는 인력은 명확하다. 매출과 직결되거나, 핵심 기술을 이해하고 있거나, 조직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이다. 산업을 이해하는 디자이너는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이들은 디자인을 통해 문제를 줄이고, 판단을 빠르게 만들며, 복잡한 상황을 구조적으로 정리한다. 디자인은 이들에게 장식이 아니라 회사 운영을 돕는 기능이 된다.
AI 시대에는 이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시각적 결과물의 생산은 더 이상 희소한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회사의 상황을 이해하고, 지금 이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능력은 여전히 희소하다. 산업과 비즈니스 맥락을 이해한 디자이너는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결과물 중에서 의미 있는 선택지를 걸러내고, 그것을 실행 가능한 제안으로 정리한다. 그래서 이들은 비용 절감의 대상이 아니라,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가 된다.
결국 기업이 위태해질수록 디자이너의 진짜 가치가 드러난다. 외주로 대체 가능한 역할은 빠르게 정리되고, 조직의 구조와 판단에 기여하는 역할만 남는다. 이 변화는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평소 어떤 포지션을 만들어왔는지의 결과다. 디자인을 결과물로만 정의해온 디자이너는 가장 먼저 흔들리고, 디자인을 산업 안의 모듈로 설계해온 디자이너는 오히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지금의 기업 환경은 그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많은 디자이너들은 취업과 커리어 경쟁을 포트폴리오 중심으로 사고한다. 얼마나 많은 작업을 했는지, 결과물이 얼마나 세련됐는지, 트렌드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방식은 이미 현실과 크게 어긋나 있다.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참고 자료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디자이너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아니다.
기업이 디자이너를 채용할 때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사고 방식이다. 이 사람이 우리 산업을 이해하려 하는지, 우리 비즈니스 구조를 파악하고 있는지, 디자인이라는 기술을 활용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지가 더 중요하다. 단순히 잘 만든 화면은 눈길을 끌 수는 있지만, 회사에 남겨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시각적 산출물은 이미 AI와 외주 생태계가 충분히 대체 가능한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저 보기좋은 포트폴리오’를 가진 디자이너일수록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 결과물은 그럴듯하지만,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그 결과가 회사의 목표나 산업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포트폴리오는 개인의 감각을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어도, 조직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이는 역량이라기보다 불확실성에 가깝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그저 이쁘기만 한 포트폴리오는 이제 필요하지 않다. 기업은 하나의 포지션을 채용하기 위해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2~300개의 지원서를 받는다. 그 모든 포트폴리오를 꼼꼼히 읽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포트폴리오는 열어보기도 전에 이력서 단계에서 커팅된다. 이력서에서 어떤 사고를 가진 사람인지, 어떤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드러나지 않으면 포트폴리오는 검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는 포트폴리오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무엇이 정의되어 있는가다. 자신의 이력, 자기 소신, 그리고 어떤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왔는지에 대한 사고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트폴리오만 무작정 쌓아 올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과물만 나열된 포트폴리오는 오히려 이 디자이너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AI 시대의 포트폴리오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무엇을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정의했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으며, 그 결과 디자인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해 포트폴리오는 결과물의 모음이 아니라 구조적 사고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성립한다. 구조를 이해하고 기획할 수 있는 디자이너일수록, 포트폴리오에 대한 의존도는 오히려 낮아진다.
이런 디자이너는 대화 몇 번만으로도 사고 수준이 드러나고, 문제를 던지면 화면이 아니라 구조로 답한다. 그래서 이들은 포트폴리오를 배제하고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는다. AI 시대에 디자이너의 경쟁력은 더 이상 ‘얼마나 잘 만들었는가’에 있지 않다. 어떻게 사고하고,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맥락에서 한 번쯤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바로 포트폴리오 스터디와 포트폴리오 컨설팅이 하나의 스펙 니즈로 소비되어온 구조다. 한동안 포트폴리오 컨설팅, 클래스, 강의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이 크게 흥행했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그 흐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비꼬아 말하자면 ‘강의팔이’에 가까운 형태로 시장이 형성된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이런 강의나 컨설팅이 전혀 의미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참고 자료로 활용하거나, 초반 방향을 점검하는 용도로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디자이너의 경쟁력을 만들어주는 정답처럼 소비되어 왔다는 점이다. 타인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라가고, 정해진 틀 안에서 포트폴리오를 맞추는 방식이 과연 지금의 산업 환경에서도 유효한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대는 점점 더 빠르고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고 있다. 산업 구조도,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역할도 계속 달라진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학원이나 타인의 기준에 자신의 방향을 맡겨야 할까. 포트폴리오는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한 결과물이기 이전에, 스스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사고의 기록이어야 한다. 이제는 포트폴리오를 ‘맞추는 것’보다, 스스로 정의하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금은 단일하고 평준화된 이력 스펙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시대다. 같은 학교, 같은 툴, 비슷한 과제, 비슷한 포트폴리오 구성을 반복해서 만드는 것이 정말 개인의 경쟁력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산업과 역할이 이렇게 빠르게 달라지고 있는데, 여전히 정답이 정해진 포트폴리오 형식을 따라가는 것이 과연 유효한 전략인지 의문이 든다. 특히 디자인이라는 직업은 개인의 사고 방식,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성장하려 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역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타인이 대신 정의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본인이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 어떤 산업과 역할을 향해 가고 싶은지는 결국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펙을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외부의 기준에 질의하고 의존하는 구조는, 오히려 사고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포트폴리오 스터디나 컨설팅, 강의가 문제가 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방향을 점검하는 참고 자료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기준이 되고 답이 되는 순간 개인의 사고는 점점 옅어진다. 남의 기준에 맞추느라 자신의 방향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포트폴리오가 만들어지기 쉽다. 결국 비슷비슷한 결과물만 쌓이고, 정작 이 사람이 어떤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인지는 더 보이지 않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잘 만든 포트폴리오’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왜 이 포지션을 선택했고, 어떤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정의하는 과정이다. 포트폴리오는 그 정의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아무리 많은 스터디와 컨설팅을 거쳐도 포트폴리오는 경쟁력이 되기 어렵다.
AI 시대에 디자이너의 시간은 더 이상 동일한 가치로 평가되지 않는다. 같은 시간을 써도 어떤 디자이너는 계속 소모되고, 어떤 디자이너는 시간이 쌓일수록 더 강해진다. 이 차이는 재능이나 숙련도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작업을 어떻게 다루는가에서 갈린다. 반복을 노동으로 소비하는 사람과, 반복을 규칙으로 전환하는 사람의 차이다.
기존의 디자인 업무는 대부분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사한 화면 구성, 비슷한 요청, 익숙한 수정 패턴들이다. 과거에는 이 반복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이 실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복을 그대로 수행하는 순간, 그 업무는 AI와 외주로 대체 가능한 영역이 된다. 반대로 반복을 관찰하고, 공통된 패턴을 추출해 규칙으로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순간 디자인은 노동이 아니라 시스템이 된다.
AI는 이 전환을 가능하게 만든 도구다. 시각화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반복되는 결과를 통해 패턴을 드러내준다는 점이다. 디자이너는 더 이상 하나의 안을 완성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여러 안을 빠르게 만들고, 비교하고, 버리면서 어떤 구조가 유효한지 검증한다. 이 과정에서 축적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판단 기준이다. 이 기준이 쌓일수록 디자이너의 제안은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쓰임이다. 시간을 더 쓰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쓴 시간이 남는 디자이너가 강해진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제자리에 머문다. 반면 반복을 체계로 만든 디자이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적은 노력으로 더 정확한 결정을 내린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크게 늘지 않아도, 사고 구조는 계속 정제된다. 이것이 시간이 ‘빛난다’는 의미다.
물론 이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시간 효율성을 잘 가져간다는 것은 늘 어려운 과제다. 필자 역시 매년 이 문제 앞에서 다시 출발한다. 매년 작업 방식을 점검하고, 구조화에 대한 밑작업을 다시 하며, 동기부여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미 만들었던 체계를 다시 허물고 가다듬는 일도 반복된다. 잘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구조화는 한 번 해두고 끝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매년 다시 손봐야 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작업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반복을 구조로 만들지 못하면, 시간은 계속 소모되기만 하기 때문이다. 매년 완벽해지지 않더라도 이전보다 조금 더 명확한 기준을 갖게 되고, 조금 더 빠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시간은 자산이 된다. 결국 시간 효율성이란 완성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계속 정리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많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구조화하는 사람이다. 반복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반복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이 능력을 갖춘 디자이너는 특정 툴이나 트렌드에 종속되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도 빠르게 적응하고, 새로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체계를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디자이너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그가 만드는 것은 화면이 아니라, 계속 작동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디자이너 생태계에서 ‘시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권리가 아니다. 시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기업이나 조직 안에서 새로운 제안, 새로운 구조,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뿐이다. 그래서 시도의 기회는 실력이 좋아 보이는 사람보다, 책임을 맡겨도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AI 시대의 시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빠르게 검증할 수 있는 만큼, 실패 역시 빠르게 드러난다. 잘되면 영향력은 커지고 역할은 확장되지만, 잘못되면 그 책임 역시 명확하게 돌아온다. 그래서 지금의 시도는 명확한 하이리스크·하이리턴 구조를 가진다. 이 구조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시도는 기회가 아니라 부담이 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더 많은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시도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다. 시도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해보는 행위가 아니다. 리소스를 쓰고, 방향을 결정하고, 실패했을 때 이유를 설명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조직은 아무에게나 시도를 맡기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 결과를 구조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 자리가 열린다.
AI는 이 경계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 AI는 요청받은 일을 빠르게 해결해줄 수는 있지만,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거나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디자이너는 조직 안에서 자발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그 해결 과정과 결과를 함께 짊어진다. 이 차이 때문에 디자이너는 여전히 필요하고, 동시에 더 무거운 역할을 요구받는다.
결국 AI 시대에 살아남는 디자이너는 가장 많은 시도를 한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전제로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판단에 이름을 걸고, 실패했을 때도 구조를 설명하며 다음 선택을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디자이너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그는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결정과 방향을 함께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디자이너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다.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변화는 단순히 디자이너의 역할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기술이 산업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디자이너가 어떤 책임을 맡아야 하는지에 대한 재정의에 가깝다. 툴을 잘 다루는 능력이나 보기 좋은 결과물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AI는 디자인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렸고, 동시에 디자이너에게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디자이너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디자이너는 오히려 더 중요한 위치로 이동한다.
이제 디자인은 결과물이 아니라 구조다. 화면이 아니라 판단이고, 작업량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이다. 반복을 노동으로 소비하는 대신 규칙으로 만들고, 시각화를 목적이 아니라 검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스스로 사고하고, 방향을 정하고, 결과를 감당하려는 책임의식이 있다.
이 변화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필자 역시 매년 다시 구조를 점검하고, 스스로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며 가다듬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시간은 쌓이지 않고 소모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AI 시대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답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의 역할을 정의하려는 태도다.
결국 이 시대의 디자이너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어떤 산업을 이해하고 있으며, 디자인이라는 기술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다면, 포트폴리오나 툴의 변화에 흔들릴 이유는 없다. 디자인은 여전히 필요하고, 다만 그 자리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열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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