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구슬

by 전주영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듣는 시간보다는 내가 말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니, 마음속 동굴에서 이야기를 꺼내놓는 시간이다. 아주 깊은 곳에 가둬뒀던 이야기부터 목을 조이는 이야기까지 하나씩 풀어내고 조각난 이야기를 퍼즐 맞추듯 완성해가는, 그런 시간. 사소한 비밀부터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위험한 칼날 같은 이야기까지도, 나는 하나씩 잘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막막했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도 했다. 말하고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 가서 외친 이의 마음이 이랬을까. 누구라도 내 비밀을 들어줬으면 했다. 숨겨왔던 상처나 금지된 욕망에 대해서. 아니나 다를까, 얇게 조각낸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리자마자 입안에서는 작은 구슬들이 매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짙은 감색의 구슬부터 머스터드 빛 노란 구슬 그리고 핏빛 서린 다홍빛 구슬까지, 분노 어린 감정인지 슬픔인지 이제는 알 수 없는 감정들.

목 안에서 꺼낸 짙은 감색 구슬을 상담사에게 건넸을 때, 커다란 비커에 담긴 투명한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린 잉크가 하늘거리며 퍼지듯 감정은 예상할 수 없는 모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번짐이 상담사에게는 어떤 온도로 느껴졌을까. 이상한 감정과 행동.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이미 저지른 것들. 하지만 물은 엎지르면 되담을 수 없듯 나는 이제 엎지른 물을 닦아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느 날에는 핏빛 구슬을 꺼내놓았다. 이건 분노였을까. 혹은 좌절감이었을까. 기억을 되짚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구슬은 날카롭게 조각나서 나를 찔렀다. 흐릿한 기억 사이로 입에 맴도는 비린 맛. 이건 무력함일까. 얇은 종이 인형 같은 나를 갈가리 찢어버린… 누군가의 손길들. 어쩌나, 이건 아직 5%도 꺼내놓지 않았는데…. 말을 이어가도 될까. 구슬은 산산조각이 났고, 구슬의 파편이 온몸에 박혀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상처 나지 않았기에 아물 기회조차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형형색색의 작은 천을 이어 붙인 퀼트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한데 뒤엉켜 나왔다. 다만 내 이야기들은 부드러운 천의 질감도 아니고 가느다란 실로 매끄럽게 연결한 것도 아니어서, 꺼낼 때마다 뾰족한 가시가 목을 할퀴어, 울고 싶은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새하얀 테이블 위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려니, 발가벗은 기분이 들어 눈물은 잠시 가둬두기로 했다. 상대는 옷을 입고 있다. 비록 지금 내가 스스로 옷을 벗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수건 정도는 한 장 걸치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었달까. 미친 사람처럼 다 벗어젖혀도 후련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친구끼리도 목욕탕은 아주 친해진 다음에 가는 거니까.

하지만 상담이 더해질수록 내면을 헤집는 데에도 가속도가 붙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 지 며칠 안 지나서 나는 결국 하얀 테이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날은 칠흑 같은 어둠을 닮은 구슬이 올라왔다. 얇은 고무풍선 안에 담겨있던 새카만 어둠은 터질 듯 터지지 않을 듯 실랑이를 벌이다 부드러운 문답법의 바늘에 찔려 결국 터지고 말았는데, 끈적한 고무 액체가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해 나는 울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이쯤에서 내가 눈물을 흘릴 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나는 준비하지 않았던 티슈를 그녀가 내밀었을 때의 뻘쭘함과 당혹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날은 주룩주룩 눈물의 홍수를 이뤘을지도 모르겠다.

상담 시간은 짧고 혼자 있는 시간은 길다. 혼자 남은 밤. 거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짙게 내려앉은 고독의 무게를, 그녀는 알까. 내면에서 꺼내 올린 알록달록한 감정의 구슬을 쓰다듬고 있으면, 나는 그녀의 노트가 궁금해진다.

그녀의 노트에선 나를 어떻게 기록하고 어떤 사람으로 분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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