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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Aug 06. 2021

업무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려 죽지도, 속 터져 죽지도 말지어다

어디서 뭔가 또 잘못 보고 배워온 박졸렬이 어느 날 이제부터 일개 직원들과 직접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그리스 신들이 델포이 신전을 통해 신탁을 내리는 것처럼 무려 석대리(!)를 통해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박졸렬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딜 가나 업무가 그렇듯, 그렇게 내려지는 업무 지시가 고대의 신성한 신탁과는 다르게 허접쓰레기 같은 것이라는 것도 문제겠다.


결핍과 과잉으로 점철된 인간 석대리는 박졸렬의 인정이 그 누구보다 절실하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새롭게 부여된 업무에 완전히 고무되어 있었다. 박졸렬에게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것은 물론, 박졸렬의 심경을 대변한다는 핑계로 몇 안 되는 직원들에게 보잘것없는 권력을 휘두를 생각에 신이 난 것이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죽을 맛이었다. 석대리는 본인만 모르게 '대리석'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뛰어난 절연체로 알려진 '대리석'이 안 그래도 알아듣기 힘든 박졸렬의 지시를 직원들에게 다다르지 못하도록 차단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박졸렬에겐 조직 내 직원과의 소통은 중요하지 않았다. 직원은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라 수족처럼 부리는 존재니까. 하지만 그런 그도 복잡하고 차가운 현대 사회 속 외로운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의 소통에 집착했다. 어디서 주워듣고는 '조회수'와 '도달수' 등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지껄이며 스스로를 '깨인 꼰대'라고 말했다. 홍차는 그런 그를 보며 '깨인 꼰대'가 아니라 '(대가리가) 깨진 꼰대'라고 생각하며 혼자 킥킥거리곤 했다.


슬프게도 박졸렬의 소통에 대한 집착은 비웃음거리만은 아니었다. 그 집착은 실체를 지닌 업무가 되어 안 그래도 힘든 홍차의 삶을 더 힘들게 할 참이었다.


"우리 연구소에서 현미차씨가 제일 젊나?"

"......"

"현미차씨??"

"....저... 홍차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요, 저 말고 진주씨가 제일..."

"현미... 아니 홍차씨가 우리 조회수 좀 알아봐 봐요. 젊으니까 이런 거 잘 알 거 아냐, 응?"

"우리... 조회수요...? 어떤 거요..?"


박졸렬은 퉁퉁한 손으로 거대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철 지난 게르마늄 건강 팔찌가 번쩍이며 터질 것 같이 그의 손목에 겨우 감겨 있었다.


지식과 과학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손목에 게르마늄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은 어쩌면 탐구와 실천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정치질과 허례허식 그리고 아부로 이 자리에 가까스로 오른 이의 미신적이고 광신도적인 믿음으로서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홍차는 박졸렬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게르마늄 팔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런 인간도 살겠다고 저런 걸 차고 다니는데... 그녀는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자신의 자기 파괴적 충동의 출처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작년 조회수! 왜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거야? 작 년 조 회 수. 조사하라고, 엉?"

"아 넵... 조사한 후에 소장님께 직접 보고..."

"아니!! 무조건 석대리 통해서 하라고 말했잖아. 아, 나한테 말 좀 걸지 말라고~ 내가 말 걸 때만 나한테 직접 보고해요."


이미 엿 같은 하루에 엿 같은 업무가 추가된 홍차는 반항할 힘 조차 없이 자리에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졸렬에게 부여받은 새로운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차는 난관에 부딪쳤다.


작년에 예술가 병에 걸렸던 박졸렬이 웹사이트의 색감과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완전히 새로 만들라고 직원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홍차가 봤을 땐 심미적으로 전혀 개선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웹사이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때문에 조회수가 전부 초기화돼버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박졸렬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된 일개 직원 홍차는 대리석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리석은 높은 파티션 사이 몸집에 비해 조금 작아 보이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회색 파티션이 웅장한 고대 신전은 아니지만, 그의 기분만은 신성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제 같았을 것이다.


"대리ㅅ... 님, 저희 작년에 웹사이트 새로 만든 거 기억나세요...? 그때 조회수가 초기화됐는데... 어쩌죠?"

"... 아... 그냥 일단 보내세요."

"이거 그래도 소장님한테 알려드리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소장님이 이해하실 거예요. 엄청 중요한 건 아니라 하시니까 그냥 보내세요."


시간이 흐른 후 홍차는 바로 이때 대리석의 멱살을 잡았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대리석이 박졸렬과 직원 간 매개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은 물론, 그로 인해 파생된 일을 아주 비열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박졸렬은 홍차가 만든 제법 그럴듯한 엑셀 파일을 보며 입을 쩝쩝거리며 흡족해했다. 홍차는 박졸렬이 흡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과연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최악의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혼란도 잠시, 박졸렬은 이를 자신의 동류 인간들에게 자랑해야 한다 생각하여 그들과 조회수 정보를 공유하라 했다.


박졸렬 친구들의 문제는 박졸렬 만큼이나 할 일이 없고 시간은 많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구구 연구소와 비슷하게 엉망으로 운영되고 있는 엉망진창 학술원의 권조조 원장이 홍차가 우려한 오류를 알아차려 연락을 취했다. 같이 했던 학회 행사인데 조회수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박졸렬은 분노하며 석대리에게 홍차한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라 시켰다.


누군가에게 으스댈 생각에 신이 난 대리석은 어떤 언질도 없이 홍차의 자리에 나타나 박졸렬이 한 말을 그대로 읊었다.


"홍차씨, 소장님이 홍차씨한테 신뢰가 안 생기신다네요."

"네? 갑자기... 신뢰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말을 들은 홍차는 당황하며 대리석을 쳐다보았다. 대리석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조회수 오류난 것 때문에 다른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네?? 그거 제가 대리님한테 말씀드린 거잖아요. 괜찮으니까 그냥 보내라 하셔서..."


예상하지 못한 홍차의 반문에 대리석은 당황했다. 박졸렬은 대리석에게 홍차가 말대답을 할 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는 말을 안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대답했다.


"그건 제가 소장님이 바쁘시니까 추가로 연락 안 하려고 배려한 거잖아요."


자신이 했던 말을 잊어버린 양 대리석은 거짓말을 하며 능숙한 솜씨로 책임을 회피했다. 그에겐 이런 거짓말은 마치 코가 막혔으면 입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처음 접한 홍차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소..소장님이 직접 보고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셔서... 대리님한테 말씀드린 건데..."

"이런 건 보고를 했어야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눈은 영혼의 창문'이라 말한 바 있다. 거짓말을 할 때 대리석의 새까만 눈동자는 평소 흐리멍덩한 그의 눈과는 달랐다. 들여다볼 깊이도 없이, 마치 암막 커튼이 쳐 있는 창문을 보는 것 같았다.


홍차는 자리로 돌아가는 대리석의 뒤통수에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워 울분을 느꼈다. 도대체 이딴 인간들은 어디에 있다가 직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인지 홍차는 알 수가 없었다... 대리석의 배신으로 홍차는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홍차는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 올랐다. 빈자리가 나 재빠르게 앉았는데, 홍차보다 가까운 곳에 서 계시던 할머니가 당황해하시며 다른 자리를 찾아 떠나셨다.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의자에 앉아버린 자신의 모습에 홍차는 화들짝 놀랐다.


어째서인지 홍차는 점점 자신이 싫어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건강도 인성도, 뭐 하나 빠지지 않고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과연 홍차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멍하니 지하철 창문 속 까만 벽을 바라보며 홍차는 오늘도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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