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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Aug 29. 2021

호밀밭의 미치광이

매일 개소리만 해대는 상사와 일하는 고충에 관하여

주먹구구 연구소는 마치 다이소에서 파는 소품용 화분 같은 곳이었다. 얼핏 보기엔 진짜 화분들과 다를 바 없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까만 스티로폼에 꽂힌 조악한 플라스틱 모형이라는 거다. 그래서 아무리 물을 주고 햇빛을 쬐여도 성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여건이 좋지 않아도 짧은 플라스틱 뿌리가 스티로폼에 꽂혀있는 한 식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먹구구 연구소와 다이소 화분은 그럴듯해 보이는 싸구려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했다.


권위와 허영심을 향한 박졸렬 소장의 지치지 않는 허기를 채우느라 일개 직원 홍차가 점점 주변 나무들처럼 앙상해지던 계절이었다. 


박졸렬은 시도 때도 없이 회의를 소집하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지르곤 했다.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성인들의 대화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건, 처음 몇 차례는 상대에게 큰 충격을 주며 자신의 말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을 너무 자주 사용하다 보면, 상대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사실 소리 지르며 하는 말 중 정말 중요한 내용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홍차 또한 처음에는 당황하여 박졸렬이 소리치는 말에 귀 기울이곤 했지만, 굳이 집중해서 들을만한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회의 동안 박졸렬의 고함을 듣는 대신, 그녀는 인간 박졸렬은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적 잘못 형성된 가치관으로 인해 벌어진 일일까?


홍차의 분석에 따르면, 박졸렬이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이유는 갓난아이가 우는 이유와 유사했다. 지금 겪고 있는 불만족의 원인을 이해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여 상황을 개선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가 배가 고프거나 배변을 하고 나서 우는 것을 나무랄 순 없다. 마찬가지로, 박졸렬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만족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맞닥뜨린 문제를 완성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소통하여, 개선하는 방법을 찾는 일련의 과정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졸렬은 갓난아이와는 다르게 이미 너무 큰 어른이었고, 그를 가르쳤어야 할 책임이 있는 어른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 그 누구에게도 박졸렬의 훈육을 다시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를 감내해야 할 사람은 홍차인 것이다.



미성숙한 인물일수록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더 쉽게 매료되곤 한다. 어쩌면 박졸렬이 주먹구구 연구소가 세계적으로 뛰어난 연구소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도 박졸렬은 바쁜 직원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망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미 훌륭한 우리 주먹구구 연구소가 한번 더 큰 도약을 할 때가 왔어요."

"......"

"국내에선 뭐 이미 비교대상이 없고, 우린 미국의 그 뭐냐, 핫스프링 연구소를 목표로 할 건데, 그런 세계 일류 연구소와 경쟁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한 번씩 말들 좀 해봐. 우엉차씨부터"

"아... 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핫스프링 연구소와의 규모와 자본, 인력 차이는 물론, 연구의 다양성과 질의 차이에서 오는 우주만큼 넓은 간극을 도대체 어떻게 메우려는 것인지. 또, TV에 한번 나와보겠다고 직원을 닦달하기보다는 충분히 연구하고 보고서를 쓸 시간을 줄 의향은 있는 것인지. 우선 직원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나 제대로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녀는 아우성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겸손으로 포장했다.


"이거 봐. 모르니까 문제잖아. 쩝. 핫스프링 연구소랑 대결을 하려면, 거기 웹사이트 들어가 봤어? 그 웹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이미지가 아주 보기가 좋아. 우리 웹사이트도 이미지 쓸 때 일류 이미지를 써야 한다, 이 말이라고!"


... 마치 공부를 잘하려면 전교 1등이 쓰는 필기구와 같은 종류를 써야 한다는 궤변을 너무나도 당당히 주장하는 박졸렬이나, 그걸 받아 적고 있는 동료 직원들의 까칠한 얼굴을 보며 홍차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주먹구구 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홍차는 인간사 희노애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더럽고 찝찝하지만 묘한 만족감을 주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양가적 감정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쓰는 이미지에 문제가 많은데, 왜 이것밖에 못하고 있는 거지?! 어?!"


박졸렬은 버릇 안 좋은 개처럼 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홍차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료 이미지라서요"

"뭐?!"

"지금 저희는 무료 이미지를 쓰고 있습니다."

"... 이미지도 돈 주고 사야 해? 어... 얼만데...?"


박졸렬의 상식은 어느 시대에 멈춰있는 걸까? 결국 이미지 파일에 돈을 쓸 수 없다는 박졸렬의 고함으로 그 회의는 파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럴 거면 왜 모이라고 한 걸까...


쓸모없는 회의로 야근까지 하게 된 홍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몸은 지쳤지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속에서 들끓는 뜨거운 울분을 참지 못해 뒤척이다 홍차는 '상사를 저주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검색창을 켰다. 하지만 이내 손에 힘이 빠져 '상사 젖'이라고 오타를 내며 핸드폰이 홍차의 광대뼈에 떨어졌다. 악 소리를 냈지만 들어주는 이 하나 없었다. 홍차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내일이 오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차라리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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