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dden thought(갑자기 든 생각)
연구소나 대기업의 핵심 부서에서 수십 년간 경력을 쌓은 시니어 엔지니어들에게 창업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무대입니다. 그들은 기존 시장의 제품들이 가진 기술적 결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 한계를 돌파할 '완벽한 기술'을 가졌다고 확신합니다.
박사급 엔지니어 출신 K 대표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가 개발한 센서는 기존 시장 제품보다 오차 범위가 0.01%나 적고, 데이터 처리 속도는 2배나 빨랐죠. 그는 확신했습니다. "이 정도 스펙이면 전 세계 제조업체들이 줄을 서서 사갈 것"이라고요. 하지만 1년 뒤, 그의 사무실 창고에는 팔리지 않은 재고만 쌓여갔습니다. 현장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기술은 좋은데, 굳이 이 비싼 돈을 내고 쓸 이유를 모르겠네요. 우린 지금 기술로도 충분하거든요." K 대표는 절규했습니다. "세상이 내 기술의 가치를 몰라주는 거야!"
이런 안타까운 장면을 수도 없이 봐 왔습니다. 수년간 밤을 새워 만든 기술적 걸작이 시장에서 '예쁜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창고에 쌓여있습니다. 그들은 기술력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유능함에 매몰되어 기술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심리학에는 '도구의 법칙(The Law of the Instrument)'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는 뜻이죠. 고도로 숙련된 엔지니어일수록 이 함정에 깊이 빠집니다.
오버엔지니어링(Over-engineering)의 저주:
고객은 90%의 성능을 가진 1,000원짜리 제품을 원하는데, 엔지니어는 자신의 기술적 결벽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99.9% 성능의 10,000원짜리 제품을 만듭니다. 고객에게 그 9.9%의 차이는 '혁신'이 아니라 '낭비'일뿐입니다.
기술적 자아(Technical Ego)와의 사투:
자신의 커리어를 바쳐온 기술이 부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시장이 "이 기능은 필요 없다"라고 말해도, "이게 핵심 기술인데 이걸 빼면 이 제품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고집을 부립니다.
저는 제가 만나는 창업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우물을 파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산을 오르는 자'입니다.
시니어 엔지니어 출신 리더들은 대개 숙련된 '기술'이라는 날카로운 삽을 들고 한 지점을 깊게 파 내려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비극적인 '시야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우물 밖에 있을 때는 주변을 선명하게 보고 우물의 자리를 잘 찾지만, 깊은 곳의 광맥을 찾아내듯 기술적 진보를 이뤄낼수록 리더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물을 깊게 파면 팔수록 리더는 우물 안의 좁은 하늘만 보게 되며, 정작 우물 밖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목이 말라 강으로 떠나고 있지는 않은지 알 길 없는 '기술적 고립'에 빠집니다. 이는 철저히 내부의 유능함을 밖으로 밀어내는 '프로덕트 아웃 (Product-Out)'의 관점에 갇혀, 기술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시장이라는 실체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반면, 시장 중심의 리더는 불확실성이라는 안개를 뚫고 '산을 오르는 자'의 길을 걷습니다. 이들은 멈춰 서서 땅을 파는 대신, 시장이라는 험준한 산을 오르며 끊임없이 사람들과 대화하고 지형을 살피는 '마켓 인(Market-In)' 전략을 취합니다. 산의 초입에서는 우거진 나무와 안개 때문에 한 걸음 내딛기조차 막막하고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아 고전하지만,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시야는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집니다. 산의 3분의 2쯤 올라가면 비로소 자신이 걸어온 길(데이터)이 보이며 시장의 흐름을 읽게 되고, 정상에 가까워지면 내가 정복해야 할 다음 산(미래 전략)까지 조망하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결국, 기술이라는 우물 속에 갇혀 '세상에 없던 정교한 깊이'에 집착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이라는 산을 올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활한 산맥'을 발견할 것인지의 차이가 사업의 성패를 가릅니다.
비즈니스는 '기술의 전시회'가 아니라 '가치의 거래'입니다. 엔지니어의 유능함이 독이 되지 않으려면 다음 세 가지 체질 개선이 필수적입니다.
1. 제품을 만들기 전에 문제를 먼저 설계하십시오.
코드를 짜거나 도면을 그리기 전에 잠재 고객을 최소 50명 이상 만나 그들의 날 것 그대로의 불편함을 수집하십시오. 내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그 기술이 고객의 비용을 얼마나 줄여주거나 수익을 얼마나 높여주는지를 냉정한 '숫자'로 먼저 입증해야 합니다. 제품이 아닌 '문제의 크기'를 설계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첫 단추입니다.
2. 기술의 우아함 대신 비즈니스의 지저분한 현장을 껴안으십시오.
연구실 안에서 0.1%의 성능 향상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줄이고, 고객의 냉혹한 거절을 직접 듣기 위해 현장으로 나가십시오. 시장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결코 '가장 뛰어난 기술'이 아닙니다. 비바람이 불고 변수가 가득한 현장에서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고객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적절한 해결책'이 결국 시장을 점령합니다.
3. 화려한 기능(Feature)이 아닌 실질적인 이득(Benefit)을 말하십시오.
제품 소개서에서 현란한 기술 스펙을 지우고, 우리 제품을 통해 고객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는지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십시오. 고객은 드릴의 회전 속도가 아니라 벽에 뚫릴 정교한 '구멍'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엽니다. 당신의 망치가 얼마나 황금빛인지 설명하기보다 그 망치로 고객의 무엇을 고쳐줄 수 있는지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십시오.
성공하는 엔지니어 창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물 안에서 삽질을 멈추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대신 시장이라는 산을 오르며 고객의 비명과 결핍을 직접 마주하십시오. 처음엔 보이지 않던 '사업의 길'이 산을 오를수록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짜 혁신은 우물 바닥의 정교함이 아니라,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넓은 시야에서 나옵니다. 이제 기술이라는 화려한 망치를 내려놓고, 고객이 쥐고 있는 녹슨 못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유능함이 독이 되지 않도록, 우물을 나와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비즈니스가 시작됩니다.
세상을 바꾸는 혁신은 연구실의 가장 깊은 우물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험준한 산 정상에서 고객의 비명을 마주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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