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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Eli Oct 06. 2023

당신은 사람을 믿습니까?

필사하며 나누며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할까요? 아무도 믿지 않으면 나만 손해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되 그가 완벽할 거라고 믿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혹은 믿음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 어떻게 사람을 얻을 것인가. (이철환) -

<질문 : 당신은 사람을 믿습니까? 어떤 사람을 신뢰합니까?>

몇 해 전 연배 지긋한 주변 지인이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말했다.

"선생님은 사람을 믿지 않는군요. 어떨 때는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상처 때문인가요? "

그는 나의 태도가 냉소적이며 아무에게도 믿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본모습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나를 들킨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내 태도를 부인하진 못했다. 그즈음 내 감정은 경직되어 있었고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인사말도 아끼는 중이었으니 주의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내 태도를 모를 수 없었다. 필사 문장이 도착하면서 지난 시간이 떠올랐고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사람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적정한 기온과 습도를 만나 활성화되는 바이러스처럼 기억들이 떠올랐다.

믿었던 사람이 뒤통수를 친 일이나 오랜 친구가 보여준 위선과 질투, 가르치던 학생의 고소와 거짓말, 교회에서의 위선과 반목. 이러쿵저러쿵 시시비비들. 유감스럽게도 나열할 것은 많지만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라 생략한다. 어떤 이에게는 "그까짓 거"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가볍지 않은 일들이었다.

우리는 정녕 험담이나 '카더라~' 하는 가짜 뉴스 말고 예쁘고 다정하게 거짓 없는 말을 주고받을 순 없을까. 겨 묻은 남의 엉덩이 보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볼 수는 없을까. 남의 엉덩이에 겨가 묻었든 꿀이 묻었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슨 상관이 있어서 갑론을박하며 에너지를 소비한단 말인가. 좋은 일에 기뻐해 주고 나쁜 일엔 조용히 위로하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일까. 남이 빨강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데 빨강은 안 된다고 왜 핏대를 올리는 걸까. 그가 빨강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조용조용히 움직이고 말할 수는 없을까. 가깝다고, 가족이라고 함부로 무례해도 되는 걸까. 나와 다르면 무조건 남의 편인가? 분노하기 전에 사실 확인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나이 외에 내세울 권위가 없어서일까. 도대체 나이는 왜 그리 따지는 건지. 20세가 넘으면 다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진 성인이다. 비판은 배운 적이 없어 못 하고 목소리 큰 것이 이긴다는 것은 너무 잘들 배워서 앞다투어 실천을 한다.

본질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모습에 질리고 피곤했다. 하나의 말과 상황이 무한대로 번식했다. 어느 날, 호흡이 편하지 않았다. 출구 없는 좁은 상자에 갇힌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답답했고 숨 쉬기가 어려웠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 때문에 핸들을 놓쳐 사고가 날 뻔도 했다.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불같이 일었다. 처음으로 심장을 다독이는 약을 먹은 후 나는 학원 강사를 그만두었고 성당에 나가지 않았으며 모임을 피하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피로감을 극대화시키는 뉴스 또한 보지 않았다. 만남을 끊으니 살 것 같았고 곧 약도 필요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지내리라 다짐했다. 스스로 잘 지낼 수 있고 사람은 필요 없다고, 마침내 관계에서 해방되어 말할 수 없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몇 개월은.

불을 끄고 누우면 다시 자라는 손톱처럼 기억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만남과 관계는 끊어냈지만 기억은 잘라낼 수 없었다. 기억이 떠오를수록 미처 하지 못 한 말들이 억울해서 다시 모노드라마를 찍었다. 그때마다 '그 일들'은 현재가 되어 나타났다. 자책도 심했다. '내 잘못이었을까? 내가 좀 더 잘했으면 괜찮았을까? 내가 참았으면 그 관계는 유지되었을까? 양보했으면 어땠을까? 그때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했을까....'

사람에 대한 불신이 나의 얕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에 신뢰할 수 없다는 것, 관계를 끊어낸 태도가 회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자 자아분열이 일어났다. 내 안의 "나"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돌을 던졌다. "네 경험이란 거,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야. 네 성격은 뭐 좋은 줄 아냐? 네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만 만난 거야. 네가 옳았다고 생각하지? 너도 문제 많아.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게? 그런 책 백날 읽으면 뭐 하니? 사람들은 다 지가 옳아. 네 경험? 상처? 그런 거 없는 사람도 있니? 널렸어. 그보다 더 해도 적당히 둥글둥글 그러려니 하며 잘들 살아. "

이 감정은 사건 후의 2차 공격이라 할 수 있는데 공격자는 나 자신이었고 나를 더욱 궁지로 내몰았다. 외부와의 일이 10이라면 이 공격은 10에 50을 더하는 큰 고통이었다. 그럴수록 더 굳게 문을 닫아걸었다. 자신만이 인정하는 '나름의 근거'는 부정적인 감정을 키웠고 반성과 성찰은 자존감을 떨어뜨렸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 편안했는데 불편했다(이 무슨 모순인가). 범인을 잡아 끝났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진범과 마주한 영화 속 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 나만 손해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것, 관계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또 하나의 쓸쓸한 상실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것, 사람들을 받아줄 수 있다고 오판한 것, 내 마음 같을 거라고 여기며 휘둘린 미숙함과 어리석음이 내 상처의 원인 중 하나였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관계를 끊어버린 나는 스스로를 깊고 좁은 동굴 안에 가두었다. 자발적으로 택한 고립이라고 생각했지만 갇힌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굴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걸까. 나는 빠져나올 생각이나 의지가 없었다. 내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동굴의 어둠이 편했다. 그곳이 진창이라 해도 그 진창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둠에 익숙해지는 것이 점점 불안해졌다. 그대로 어둠이 될 것 같았다.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한 상태에 놓이고 있다는 느낌은 확인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빛 가운데로 나가고 싶었다. 누가 날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행운아였다.

집 앞엔 전나무 숲이 있었고 기꺼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준 남편이 있었다. 숲은 나를 불러내어 숨을 쉬게 했고 자책이나 후회가 아닌 다른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했다. 제발 반성과 성찰은 그만하고 조용히 숲의 소리와 냄새나 맡으라고 속삭였다. 남편은 말없이 나를 지켜봐 주고 반복되는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으며 공감을 가장한 비난도 그 어떤 교훈적 조언도 비평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분노로 씩씩거리던 내가 누군가를 해하고 싶다고 하자 그저 듣고 있던 남편은 "감옥은 내가 갈게."하고 말해서 날 웃게 했다.

남편을 감옥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무기력하게 잠만 자고 늦은 밤까지 TV만 보던 나는 걷기 시작했다. 햇빛을 쬐고 숲의 공기를 마시며 매일 걸었다. 3개월을 걸으니 몸과 마음에서 독소가 빠져나갔다.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도 가벼워졌다. 다시 독서를 하고 글을 썼다. 종종 여행을 하고 악기를 연주했으며 그림을 그리는 창작 활동과 감성의 즐거움을 누렸다. 수영을 다시 시작했고 자주 도서관에 들러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만나지 않을 거야'에서 '좀 더 충만한 시간을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어'로 바뀌어 갔다. 유난히 햇살과 바람이 좋았던 날, 끝없이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동굴이 아닌 하늘을 보고 있었다.

삶의 시험이었는지 한 빌런이 내게 다가왔는데 이상한 연민이 가득 차올랐다.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해서 나는 놀랄 만큼 친절한 언어와 태도로 그를 대했고 그 빌런은, 빌런이었어야 할 그 사람은 미안하다고 말했다(그는 빌런이 아닌 또 한 마리의 미운 오리였을 뿐이다). 그때 느낀 해방과 자유로움이란! 딱딱하고 슬프게 눌어붙어 좀처럼 벗겨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이 허물어지며 함께 남아있던 분노와 자책과 미움을 데리고 떠다니다가 점점 흩어졌고 사라졌다. 나는 약간 상기된 채 수영장으로 가서 쉬지 않고 레인을 돌았다. 호흡은 가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이 가벼웠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일을 간직하고 있다.

내 삶엔 여전히 꽃이 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도 내린다. 오늘도 나는 미운 오리 둘을 만나 탈탈 털렸다. 여전히 미운 오리들은 나이를 앞세우며 본질과는 먼 이야기만 쏟아냈다. 상대방의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말을 쏟아내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오리가 아니다. 걷느라고 발바닥엔 없던 굳은살이 생겼는데 굳은살은 발바닥에만 생긴 것이 아니다. 오리들에게 털리긴 했어도나는 오늘도 나를 지켰다는 긴 일기를 썼다.

"'나'도 '너'도 사람은 다 비슷해. 판단하지 않으리라. 오해와 실망, 옳고 그름, 편견과 시시비비의 시작은 판단으로부터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얼마나 오만한가.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애초에 가질 기대도 믿음도 오해도 없으니 마음을 잃을 일도 없다. 거절은 유연하고 분명하게, 감정은 단순하고 솔직하게, 무엇보다 깊은 연민을 가질 것. 연민은 판단하지 않는 자에게 있다. 나와 다르면 그렇구나~ 비슷하다면 그것도 그렇구나~ 할 것. 적어도 내 나이가 부끄러움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말 것. 나이는 훈장도 권력도 권위도 어떤 종류의 우월함도 아니다. 죽음에 더 가까워진 것이며 그저 연금을 받는 기준이 될 뿐이다. "

'사람을 믿어야 할까요?' 필사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미 그 답을 일러주고 있다.

"사람을 믿되 그가 완벽할 거라고 믿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혹은 믿음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믿는가? 그렇다. 결국 믿더라. 또 몇 번의 뒤통수를 맞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을 믿더라. 뒤통수치는 사람들 곁에 좋은 사람들이 더 많더라. 그들은 항상 내 곁에 있더라. 이것이 나의 천성인지, 습성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믿더라.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람이 두렵고 새로운 관계 앞에서 머뭇거린다. 상처의 흔적은 남는 것이기에.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믿나요? 만일 당신이 사람을 믿는다면 더 따뜻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며 계속 잘 지내길 기원합니다. 또 믿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에게도 이 문장이 어떤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긍정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부정적인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니까요. 삶의 질문에 대한 해답들은 그 어디에서든 주어집니다.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해답을 살지 않을 뿐이지요. 그 해답을 살아가는 것은 '나'의 선택이겠지요. 그 어느 쪽이든 당신께 '진달래꽃 아름 따다 드리'는 축복의 의미로 이 꽃다발을 드립니다. 부디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며 자신을 잃지 않고 내내 평안하시기를!

따스한 필사팀 감사합니다!

당신과 내가 갈 그 길에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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