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라해요
바람이 살살 불어 단풍나무를 건드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딩 친구들과 약속한 날이다.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커피를 담아 집을 나섰다. 이 집 저 집 담벼락과 울타리엔 철쭉이 피기 시작했다. 날은 맑고 따뜻하다.
3개 역을 잇는 자전거길이 오늘의 코스다. 거리는 13km,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지도에 표시된다. 왕복이면 26km. 무리하면 후회할 일만 생긴다. 접이식 자전거로 가기 적당한 거리다.
자, 출발! 다치지 맙시다!
페달을 밟자마자 온몸이 시원하다. 꽃향과 신선한 풀내, 물냄새가 길에 가득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주변을 둘러본다. 꽃과 햇살, 바람과 함께 길은 강과 나란히 흐르고 지나가던 자전거가 인사한다.
"안전한 라이딩되세요!"
마치 외국의 어느 순례길에서 한다는 "부엔 까미노"같은 인사다. 마음이 순해졌다.
꽃이 지는가 싶었는데 나무들은 어느새 초록 이파리들로 풍성해져서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무 그림자가 참 예쁘다. 길 아래로 강물이 반짝이고 멀리 작은 파랑이 일렁였다. 눈이 부시다. 앞서 달리는 친구의 자전거가 반짝였다. 친구는 흥에 겨운지 팔을 번쩍 들고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아, 우리도 길과 함께 반짝이는 풍경이었다!
오르막인가 보다. 다리는 둔해지고 숨이 찬다. 자전거는 다섯 번째 굴 안으로 들어갔다. 춥고 바람이 심하다. 모든 바람이 한꺼번에 굴을 지나쳐 가는 것만 같다. 바람을 안고 낑낑거리며 나아가는데 앞서가는 친구가 "야호~ "하며 탄성을 지른다. 굴을 빠져나오니 양 옆에 늘어선 나무들의 새순들이 햇살에 비쳐 투명하다.
오르막을 힘들게 오르고 나면 꼭 예쁜 풍경이 나타나는데 자전거 길의 공식인가. 아니면 자전거에게 내미는 길의 당근인가? 나는 그 당근을 냉큼 받아 풍경에 마음을 뺏기고 페달을 밟는 다리는 그새 피곤을 잊고 만다. 게다가 예쁜 꽃들은 더불어 받는 선물 아닌가. 눈길 가는 곳마다 청명하고 투명한 색깔들, 꽃들은 다르게 얽혀 피어도 자연스럽다.
만일 빨강의 셔츠에 분홍 바지를 입고 노란 신발을 신는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과하다고 지적하지 않을까. 꽃들은 과하기는커녕 저렇듯 섞여있어도 조화롭기만 하다. 우리도 각자의 색깔로 다르지만 조화로웠으면 좋겠다.
이봐~, 둘이 뭘 소곤대나? 같이 가자구!
앞서 가던 두 친구가 무슨 작당을 했나 보다. 라이딩 코스를 변경했다고 했다. 목적지 근처에 있는 H 씨 집 정원에 꽃이 예쁘게 피었다며 가자고 한다. 자동차로만 오고 가던 친구네 집을 자전거로 가다니! 와우~ 스스로 대견했다. H 씨가 사는 동네도 철쭉이 한창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꽃길을 천천히 걸어가니 길도 집도 꽃대궐이다.
꽃을 본 것도 은혜로운데 H 씨는 좋은 와인이 있다며 내놓는다. 와인에서도 꽃향이 났다. 낮술을? 집엔 어찌 갈 거냐, M에게 전화하면 되지. 빨리 전화하시오, 차와 치킨이 필요하니 냉큼 오라 했다. 착한 M 씨는 치킨을 들고 웃으며 나타났다. 치킨 한 마리가 왔으니 새 와인이 필요하겠지? 당근이지. 당연한 걸 말한다며 S 씨가 화가 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까르르~ 그녀 덕분에 또 웃는다. 대낮 와인은 우리의 미소를 더욱 발그레하게 만들고 바람은 소나무에서 연기를 피워냈다. 송홧가루가 날리는 계절이다.
연기처럼 날리는 송홧가루를 보니 늘 고단하기만 했던 엊그제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가 웃으며 잔을 부딪쳐 왔다. 이런 날도 저 송홧가루처럼 흩어져 가겠지... 다음엔 송홧가루를 보며 이 날을 기억하겠지.... 친구들과 달린 꽃길, 와인, 송홧가루, 이 계절에 내가 있구나.... 나는 또 히죽 웃었다.
우리는 이날, 자전거를 친구네 집 차고에 두고 착한 M 씨 차를 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자전거는 아직 H 씨네 집에 있고 우리는 자전거를 가지러 가서 또 와인을 딸지도 모른다. H 씨 와인은 하나같이 매우 훌륭해서 떨쳐내기가 어렵다. 절대 핑계가 아니다. 히죽~^^
자전거와 꽃과 와인과 친구.
오늘도 즐라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