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하며 나누며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 이 글쓰기의 목적은 필사 문장을 다시 음미하고 확장하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다루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하나는 그것을 감추고 자신의 허영심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네. 이 방법은 누구나 쓰고 있지. 나도 쓰고 있고. 그렇지만 절대 만족을 얻을 수는 없네.
또 하나는 고백이네, 그러나 쓸데없는 사람이나 고백을 듣고 경멸하는 사람,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내게 해를 입히려는 사람에게는 고백하고 싶지 않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내가 믿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 아니면 가르침을 주며 훈계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고백해야 하네. 그때는 아주 유쾌한 기분이 들 걸세. 나 자신이 유쾌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네.
- 나쓰메 소세키, 인생 이야기 -
" 자신의 약점을 다루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나는 어디 가서 흥정을 하지 못한다. 얼굴에 감정과 생각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포커페이스라는 말은 나와 관련 없는 말이다. 이 얼굴로 포커를 쳤다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할 것이 뻔하다. 좋고 싫은 감정과 관심 없는 마음, 못 마땅한 기색 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은 흥정에서 매우 불리하여 대부분 실패한다. 내 딴엔 표정을 숨기고 원하는 것을 말한다지만 표정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필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제안이 먹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흥정이 잘 될 리도 없고 상대를 설득할 수도 없다.
관계에서도 그렇다. 마음을 숨기지 못해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거나 되려 공격을 받는다. 상처를 주는 일이든 공격을 받는 일이든 내겐 뼈아픈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얻은 게 무표정이다. 이 무표정은 어느 정도 내 감정과 생각을 감추는데 더러 유용하긴 하지만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화가 났다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비쳤고 빨개지는 얼굴은 여전해서 그만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또 하나는 고백이네."
나는 적당한 때에 사람들에게 고백을 하곤 한다. 얼굴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무표정한 얼굴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멍 때리는 중이거나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고. 설사 내 얼굴이 빨개졌다고 해도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나는 가능한 솔직하려고 한다고. 내 솔직함은 표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완하는 자구책이니 그것이 불편하다면 참거나 오해하지 말고 언제든 말해 달라고.
세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대부분 하나의 실체가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이익이 있으면 손해가 있다. 밤과 낮, 기쁨과 슬픔, 남성과 여성 등 사례는 무수히 많다. 나도 잘 모르는 동양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동전이 두 개의 다른 면을 가지고 있듯 세상도 그러하니 뒤집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습을 놓고 북쪽으로 막혀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남쪽의 대양으로 드넓게 열려 있다고 보는 그런 관점의 차이 말이다. 한 방향으로만 보는 생각은 자유롭지 않고 고정된 틀에 나를 가두어 놓는다. 이런 생각은 정말 힘이 세서 우리를 쉽게 놔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쉽다. 지금 당장 손바닥을 뒤집어 보자. 쉽지 않은가. 아주 잠깐 다르게 생각해 보면 된다. 흔히 말하는 생각의 전환, 거꾸로 보는 관점으로 말이다.
흥정을 할 수 없다면 흥정을 하지 않으면 된다.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흥정을 하기도 전에 지는 일 없이 그냥 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정가대로 산다. 흥정을 거쳤다면 정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해도 억울해하지 않는다. 감정을 숨기느라 애쓰지 않았기에 지불한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숨기려다가 억울한 오해를 받고 일을 더 키운 적이 많았기에 차라리 그대로 드러낸다. 다만, 표정에서 이미 드러나버린 감정이지만 그것이 나를 다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기에 완곡한 언어를 보탠다. 내 표정은 이렇지만 실제 내 감정은 그게 아니고 이렇다, 또는 저렇다 하며 비교적 솔직하게 말한다. 말이 너무 길게 섞이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으므로 그 언어도 가능한 단순하고 완곡하게, 처한 상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전달한다. 그랬더니 표정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자주 실패하는 내게 솔직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솔직함은 숨기지 못하는 표정의 또 다른 면인데도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은 신중하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처럼 성격이 급한 사람은 추진력이 강한 사람일 수도 있다.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오히려 전체를 관망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감각이 예민하여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남들이 지나치는 것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과 치밀함을 가진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예민함으로 보는 것과 민감함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부정적인 약점으로 후자는 특별한 장점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장애로 인해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다른 능력이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가 있구나의 관점에서 내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겠구나의 관점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약점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 차이를 비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은 어렵지 않다. 뒤집어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심한 입덧으로 힘들어할 때 주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 이 사람, 입덧으로 고생하긴 하지만 전에 없던 초능력이 생겼어요. 10분 거리에 있는 튀김 가게의 냄새를 맡는다니까요. "
사람들은 이 말에 웃었지만 남편은 누굴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뒤집어 생각한 것이었다. 입덧이 초능력을 불러왔다고 표현되는 순간 나의 입덧은 무언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입덧은 순해졌고 심한 입덧 때문에 아이를 가진 것을 후회하려던 마음도 달라졌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남들보다 뛰어난 손끝의 감각을 가졌다.
약점을 약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뒤집어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이제 굳이 숨길 수 없는 내 표정으로 곤란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 표정이 나만의 솔직함이라는 강점이 되었으니까. 다만 솔직함을 내세운 무례함과 뻔뻔함은 경계하려고 스스로 돌아보곤 한다.
노력으로도 개선하기 어려운 약점 때문에 위축된다면 뒤집어 생각해 보라.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다른 지평 안에서 장점이 될 수 있다. 나는 한 때 먼 거리에 있는 튀김 가게의 냄새를 맡았던 초능력자이기도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