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위안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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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울산 저널에 2019/06/05에 실린 글입니다.
죽을 만큼 억울한가?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 죽을 만큼 억울했던 사람이 있다. 아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 바로 보에티우스다. 보에티우스는 기원전 475년에서 477년 사이에 태어난 로마 사람으로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관직인 콘술에 올랐고 그의 부친과 그의 자식들도 모두 콘술에 올랐을 정도로 명문가 출신이다. 그런 그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거짓 고소를 당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와 사형 판결을 받는다.
『철학의 위안』은 바로 그때 쓰여진 책이다. 가장 억울하고 가장 힘들 때 보에티우스는 평생 추구하고 공부해왔던 ‘철학’으로 극복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가장 빛난다. 철학이 철학적 사변에만 머무르지 않고 닥쳐온 삶의 사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 책은 대화의 형식으로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닥친 상황을 억울해하는 ‘보에티우스’와 이것을 바라보는 ‘철학의 여신’이 대화를 한다. 여기서 ‘철학의 여신’은 보에티우스의 또 다른 상위 자아라 할 수 있다. 1권은 울고 있는 보에티우스 앞에 철학의 여신이 등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여신은 먼저 보에티우스의 현재 상태를 진단하는 데 그 진단의 결과는 철학을 잊어버린 기억상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치유를 위해서 우선 약한 약을 처방한다. 이는 더욱 강한 약인 ‘철학’을 처방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보에티우스의 당면 문제는 자신이 가진 억울함을 풀어놓는 것이다.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 앞에서 곧바로 철학적 이성적 사유를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평생 철학을 추구해온 사람에게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격한 감정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1권에서는 보에티우스가 당한 억울함을 풀어놓도록 한다. 2권 3권 등으로 나아가면서 운명, 우연과 필연,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복, 절대적 존재인 신과 선악의 문제 등의 철학적 물음으로 나아간다.
‘운명’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세 로마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 사람들이 물었던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보에티우스의 ‘운명’에 대한 물음이 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지 철학적 사변에만 머물러 있는 물음이 아닌 당장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평생을 정직하고 이상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갑작스레 닥친 억울한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에 대한 물음. 이는 불가항력적으로 보이는 상황 앞에 선 자의 삶에 대한 기본 태도 문제이다.
보에티우스가 찾은 답은 운명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삶 전반에 관여하는 섭리를 알 수 없다. 섭리에 관여하는 것은 ‘신’의 존재인데, 보에티우스가 말하는 ‘신’의 존재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도달한 ‘최고 선’으로서의 신이다. 섭리는 모든 곳에 모든 상황에 내재하는 원리로써 운명마저 그 안에 포섭시킨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운명마저도 섭리 안에서는 순기능 역할을 한다.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평생 자신을 알 수 없고 자신을 넘어 설 수도 없고 죽을 때까지 자신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자신’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닥치는 사태 앞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섭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는 결코 수동적이거나 무력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강력한 의지적 태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태도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유대인 수용소 출신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의 자유를 획득하였듯이, 보에티우스가 억울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했듯이 우리에게도 일말의 자유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아직도 억울한가?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