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매직 그 자체
첫 번째 뇌물수수 사건을 본 것은 수즈달이라는 작은 도시에 방문하였을 때였다. 당시에 수즈달 크렘린을 보기 위해 다른 차들도 다 주차를 해 둔 곳에 잠시 차를 주차해 놓았었는데 (시골이라 주차 표시가 잘 안 되어 있다) 차를 빼려고 보니 경찰이 주차하면 안 되는 곳에 주차를 했다며 벌금을 내라고 했다. 버젓이 다른 러시아인들은 주차를 하고 차에서 빠져나오고 있는데 우리 일행에게만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처음엔 우리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지만 러시아 경찰들은 뇌물을 요구할 때 돈 없는 자국민보다는 돈도 더 많고 트집 잡기 도 쉬운 외국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다고 들었다. 나와 같이 간 일행 A는 이를 외국인 차별이라며 따지려고 했지만 다른 일행 B가 나서서 말렸다. 법정까지 갈 경우, 재판관들도 다 자국민과 한패라서 법정 싸움에서 지는 경우가 많고 벌금뿐만 아니라 강제 추방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한일 강점기 시절 일본식 재판도 아니고 이게 무슨 뭣 같은 상황인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B가 죄송하게 됐다면서 뇌물을 쥐어주는 걸 보았다.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도 법정에 가서 소명할 건 소명하고 벌금을 내야 한다는데, 그래봐야 경찰한테 남는 건 없으니 경찰도 대충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이제 가봐도 된다는 눈치였다. 러시아에 온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차를 빌려 러시아 남부 여행을 할 당시였다. 당시 운전자였던 나는 도로에 차가 별로 없고 앞차가 너무 느리게 가기에 추월을 하였는데, 추월차선이 아닌 실선에서 추월을 하여 경찰에게 잡히게 되었다. 경찰관은 화를 내며 실선에서 추월을 하면 어떻게 하냐면서 나를 다그쳤다. 그러면서 경찰차로 데리고 와 본인은 운전석에 나를 조수석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는 아주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말을 하고 법정에 가고 싶냐고 물어봐서 그렇지 않다고 하니 나를 뻔히 쳐다보더라. 성의를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길래, "성의"라면서 크게 물으니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5천 루블(당시 약 10만 원)을 주면 법정에도 갈 필요 없고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을 거라며 자신이 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재밌는 건 이미 다른 사람에게도 뇌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학생할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경찰에게 방학 때 잠깐 차를 빌려 나왔는데 학생이라 정말 돈이 많이 없다 하며 학생증을 보여줬더니 3천 루블로 깎아줬다. 경찰은 나에게 돈을 직접 건네주면 안 되고 조수석에 놔두고 가라고 했다. 자신은 뇌물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조수석에 있는 돈을 주은 거라고도 친절하게 알려줬다. 나는 점차 러시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려 할 때였다. 아내는 2인실 방을 혼자 쓰고 있었는데 룸메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아내의 방을 아지트로 쓰고 있었던 우리는 굉장히 긴장했었다. 그래서 벌벌 떨고 있기보다는 먼저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인들은 단 음식(사탕, 초콜릿 등)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일단 마트에서 꽤 괜찮은 초콜릿을 사서 초콜릿 상자 안에 아주 잘 보이게 2천 루블과 작은 편지를 넣어두었다. 새해 인사를 할 겸 찾아왔다는 말과 함께 초콜릿 상자를 건넸고 아내가 지금 쓰는 방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며 혹시나 룸메이트가 새로 오는지 물어봤다. 우리 사감은 아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우리의 말을 듣고는 바로 별로 걱정할 게 없을 거라 말했고, 그렇게 우리는 아지트를 사수할 수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모스크바의 곳곳에는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지하철 역이나 관광객이 많은 곳 등에는 경찰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보통은 하릴없이 수다를 떨고 그런다. 이런 경찰들은 심심하면 지나가는 외국인들(적어도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잡아서 심문을 하는데 여권과 등록증 등 지참해야 할 서류가 있는지 검사를 하고 행선지가 어딘지 묻기도 하며 소지품을 검사하기도 한다. 한 번은 친구들과 고기를 궈먹으러 지하철을 타려고 이동 중이었다. 경찰이 나를 붙잡더니 검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사무실로 따라오라며 지하철 역 한편에 있는 장소로 나를 데려갔다. 여권과 서류 등을 보여주고 나니 잡다한 걸 묻기 시작했다. 어디 가냐, 왜 가냐, 친구는 몇 명이냐 등 시시껄렁한 것들을 물어봤다. 소지품도 검사했지만 나는 불판 담당이라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러자 술은 먹냐, 술은 누가 갖고 있냐, 네가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이상한 말들만 늘어놨고 내가 영 뇌물을 줄 생각을 안 하자 트집 잡을 것도 없고 결국은 풀어줬다. 이런 식으로 지나가는 행인을 잡고 오랜 시간 안 놔주면서 뇌물을 바라는 경찰도 많다. 정 외국인이 없으면 내국인도 잡아서 이런 식으로 귀찮게 한다 하니 러시아에선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 않다.
뇌물 관련 일을 겪을 때마다 항상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있다.
"러시아에선 되는 것도 안되고, 안 되는 것도 된다."
러시아에 가면 새겨둬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