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I Travel Jan 17. 2023

예비학부 졸업, 그리고

하나의 마지막이자 또 다른 하나의 시작

전체적인 교육과정으로 보았을 때, 모스크바 국립대의 예비학부는 노력은 조금 필요하지만 대단히 힘든 과정은 아니었다. 수업을 반정도 빼먹거나 도저히 안될 것 같은 경우가 아니면 소위 졸업시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매 학기마다 시험이 있고 70정 정도만 넘으면 합격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러시아어, 수학, 물리 이렇게 세 과목을 수강했는데 러시아어는 말하기와 쓰기, 그리고 토르플이라는 러시아 어학능력 평가 시험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한 사지선다의 문법 문제도 풀었었다. 러시아어 말하기 시험이 있던 날에는 같은 반이었던 지인과 긴장을 좀 풀자는 의미에서 학교 근처 마트에 가서 맥주 한 캔을 사서 나눠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지만 당시에는 지인과 맥주 덕에 시험을 더 잘 본 것 같다며 시시덕거렸었다.


수학시험에는 주관식 문제들이 나왔었고 풀이과정과 정답을 모두 맞춰야했다. 후반부에 배웠던 이중적분과 같은 고급 기술들에 대해선 문제가 나오지 않아 나름 수월하게 풀었던 기억이 난다. 물리 시험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수학과 비슷하게 문제를 푸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치 학위과정 방어(디펜스)와 비슷하게 작은 을 리포트(논문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러기엔 수준이...)를 준비해서 발표하고 질문을 받아 잘 방어가 되면 합격을 받는 식이었다. 고등학교 땐 화학과 생물, 대학교에서 화학을 했기에 물리에 대해서는 도르래 문제 정도밖에 모르기에 앞으로 배워야 하는 핵물리에 관한 작은 리뷰 리포트를 쓰는 것조차도 매우 어려웠고 발표할 때나 질문을 받을 때도 많이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입자-파동의 이중성에 대한 리뷰를 했었는데, 그 당시 나에겐 아주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물리 2의 해설본 정도가 되지 않나 싶다. 


여튼 생각보다 점수는 고르게 잘 나와서 선생님들에게 칭찬도 받고 작은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예비학부는 예비학부 일뿐 본게임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비학부의 졸업시험은 5월 중순에 있었고 그 후 7월 즈음에 본학부의 입학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예비학부를 거치지 않고 본학부로 바로 입학하는 건 절차나 시험이 꽤나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예비학부를 거치면 이 입학시험만 통과하면 된다. 약 두 달이라는 시간이 있었기에 차분히 준비하면 되었지만 인터넷으로 다운 받은 기출문제는 영 사람이 풀 수 있는 것처럼 생기지 않았다. 다행히 모터쇼 티켓을 주었던 지인분께서 그 학과를 먼저 다니고 계셨기에 고맙게도 과외 형식으로 이것저것 알려주셨다. 무언가 어려운 것을 설명할 때 그분의 반짝반짝 빛나던 눈과 아직 우리는 많은 걸 알지 못한다는 그분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난다. 진정한 학자란 이런 걸까 나도 언젠간 학자다움을 조금이나마 갖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당장은 시험에 집중해야 한다. 


입학시험은 예비학부에서 치렀던 시험과는 다르게 실제 러시아인들이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러시아의 시험은 "빌렛(영어론 Ticket)"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시험 전에 학생들에게 3-4 배수 많게는 10 배수 넘는 시험 문제를 미리 나누어준다. 학생 수가 10명이라면 교수에 따라 30-40문제를 줄 수도 100문제를 줄 수도 있다. 학생은 시험 당일 예상 문제 중에 한 개를 교수가 보는 앞에서 임의로 선택한다. 다행히 모든 문제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이 공부한 것을 뽑았다면 행운, 그렇지 못했다면 굉장히 슬플 것이다. 그렇게 문제를 뽑고 나면 학생들 스스로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에 학생들은 종이와 펜을 쓸 수 있고 종이에 자신이 발표할 내용은 정리하여 작성하고 호명이 되면 교수와 1대 1로 앉아서 발표를 하고 교수가 관련 질문을 하고 학생의 발표와 답변을 종합하여 점수를 결정한다. 점수는 5단계 스케일을 적용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1점은 주지 않고 2점부터 5점까지가 부여된다. 1점을 주지 않는 이유는 숫자 1이 몽둥이나 말뚝을 연상할 수 있다고는 해서 그렇다 한다. 2점은 미흡, 3점은 양호, 4점은 우수, 5점은 탁월이라는 러시아어로 불리지만 사실 2점을 주는 경우도 거의 없고 3점만 맞아도 양호가 아닌 요구 수준에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지인분의 노력 덕분일까 다행히 입학시험도 통과하였고 (입학시험은 점수제가 아닌 합불제라서 점수가 나오지 않음) 이제 본게임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그전에 잠시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러시아 여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