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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Aug 28. 2019

국제기구 연차회의의 생생한 현장에서

내가 소싯적 환상을 가졌던 국제회의의 속살

국제기구 하면 아마도 각국의 대표들이 큰 회의실에 모여 자국 명패 또는 국기를 앞에 놓고 통역기를 귀에 꽂은 채 진지하게 회의하는 광경이 먼저 떠오를 듯하다. 국제기구에서 일한다고 해서 내 생활이 바로 이런 장면의 연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반 회사에 비유한다면 이런 회의는 한마디로 주주총회 같은 것이다. 대다수의 회사원은 그저 각 부서와 필드에서 각자의 본분을 다할 뿐이고 주주총회에서는 회사의 높으신 분들과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주주들이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당연히 이런 식의 회의는 일 년에 몇 번 없다. 그리고 내용 역시 진정한 회의라기보다는 사전에 90% 이상 준비되고 협의된 과정을 각국 대표들과 기구 수뇌부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확인하고 공식화하는 과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회사는 1년에 두 차례 중요한 회의가 있다.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전 세계의 정부 대표단이 워싱턴으로 날아와 1주일간 각자 필요한 미팅들을 하고 주말에는 거대한 회의장에 대표단 전원이 모여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전체 회의를 한다. 내가 일하는 부서의 일이 전체 회의 주제에 상정되고 그 회의가 일요일에 잡혔다. 원래 회의 진행 준비는 전담하는 직원도, 이쪽 일을 주로 담당하는 팀도 있지만 모든 국가대표들이 모이는 가장 큰 회의다 보니 우리 팀 사람들 전체에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이럴 때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도와줘야 위에도 잘 보일 것 같고, 또 실제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싶기도 해서 실로 오랜만에 일요일에 회사에 출근하여 회의 지원을 하게 되었다. 주말에 아침부터 정식으로 회사에 출근하기는 한국을 뜬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텅 빈 도심으로 들어와 반 정도만 불이 켜진 회사 건물에 입장하니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오래전 한국에서 어떤 보험회사 인수합병 건 프로젝트하던 날이었다. 그래 그날도 일요일에 딱 이런 느낌으로 사무실에 들어왔었지…


일요일이라 텅 빈 회사 건물이었지만 회의장 안은 벌써 열기가 뜨겁다


회의는 각 세션마다 먼저 경영진이 의제에 대해 발표를 하면 각국 정부 대표들이 그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 질문 등의 발언을 하고 마지막에 의장이 모든 국가들의 발언을 정리하여 요약정리 발표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발언은 한 국가당 3분 내로 제한되는데 의장이 예컨대 “한국, 발언하세요.” 하면 그 순간부터 스크린에 3분 카운트다운이 뜬다. 의제에 따라 모두가 한 마디씩 하고 싶어 하는 경우 결국 4-50개국이 발언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누구는 발언하고 누구는 못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꽤 지루해지기도 한다.


내가 할 일은 몇 가지 현장 지원업무였다 - 회의록 작성 (각국 대표단이 발언을 하면 각국의 입장이 어떤지 빠짐없이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3명 이상이 동시에 회의록 작성을 하고 차후에 함께 정리한다), 실시간 회의 요약 (회의록 작성과 별개로, 실시간으로 회의 내용의 요점 정리 노트를 만드는데 이것을 회의시간 중에 작성 및 수정하여 해당 세션의 종료 직전에 의장에게 전달해야 의장이 요약정리 발표를 하는 것으로 그 세션의 회의를 마무리할 수 있다), speaker spotter (발표자 찾는 사람 - 각국 대표단이 발언하고자 할 경우 자기 국가 명패를 세로로 세워놓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는데 회의 진행요원들이 그걸 눈으로 포착해서 시스템에 입력한다. 보드룸에는 자동 버튼 시스템이 되어 있는데 이 회의는 강당에 모여하는 바람에 이렇게 수동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runner (회의 요약자가 요약본 초안을 프린터로 쏘면 그걸 출력하여 관계자들에게 전달하고, 관계자들이 수정/가필하면 회수하여 다시 요약자에게 가져다준 후 최종본을 출력하여 의장에게 전달하는 역할. 말 그대로 여기저기 뛰어다니게 되는 역할이다) 등의 역할이 있는데 나는 회의록 작성과 runner 역할을 번갈아 맡게 되었다.


회의록 작성은 단상 중앙에 위치한 의장과 주요 발표자들 바로 뒤에 있는 책상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작성하게 되는데 나름 폼나는 일이다 (대부분 영어로 발표하지만 영어를 잘하면서도 고집스레 불어로 발언하는 프랑스 대표와 일부 아프리카 대표들이 발언할 때에는 헤드셋이 필요하다). 보도자료 사진 같은 것에 찍히면 꽤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unner의 경우 회의실 구석에서 대기하다 회의 요약자가 사인을 주면 복사기로 뛰어가 출력물을 가지고 관련 디렉터들이나 의장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처음엔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이 나이에 복사기 앞을 뛰어다니는 일을 하게 되다니…’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박진감 넘쳤다. 회의 진행 중에 회의장 내부를 잰걸음으로 뛰어다니고, 단상에 앉아 있는 주요 인사들과 뭔가 중요한 말을 하는 듯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며 (실상은 '수정 끝나셨나요? 이거 누구누구한테 갖다 드릴까요?' 같은 말) 최종본을 출력하여 그걸 내 쪽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 기구 CEO의 손에 직접 쥐어다 주는 일을 하니 (나 같은 working level 직원은 국제기구의 수장을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뭔가 내가 이 회의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장단 뒤로 회의록 작성 중인 동료들을 복사기 통로 옆에서 지켜보는 중이다.


회의에서 다루는 내용은 당연히 중요한 일들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들을 한 발짝 떨어져서 큰 그림으로 보고, 지난 수년간 결과가 어떻게 쌓여 왔는지를 보는 과정은 자신들의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가 궁금한 각국 대표들은 물론 직원인 나에게도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숫자와 그래프로 대표되는 딱딱한 내용 이외에 흥미로운 동영상들도 있었고 (우리가 하는 일들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한 세션에서는 남미 한 국가의 대통령이 방문하여 자신의 인생 스토리와 자국에서 추진 중인 인적자원 개발 사업에 대해 연설하기도 했다. 회의는 내용도 알찼고, 진행에 기여하면서 보람도 느낄 수 있었으며 또한 수많은 참가자들의 에너지도 느낄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9am to 5pm으로 하루 종일 회의만 진행하다 보니 각국 대표단도, 단상에서 진행하는 우리 기구 수장 이하 높은 분들도, 이것저것 진행 및 지원하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지친다. 사람들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지는 순간은 커피 브레이크와 점심시간, 그리고 아무래도 가장 밝아지는 순간은 회의의 끝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이다. 의장이 회의 종료를 선언하자 참가자들의 얼굴에서 안도감과 노곤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마도 이 회의가 거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어서일 것이다. 각국 대표단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이제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급박하고 치열하게 진행된 주말 근무가 끝나고 텅 빈 도심을 가로질러 집에 왔다. 국제기구에 이미 3년 넘게 근무했지만 사실 오늘 같은 경험은 나도 처음이었다. 각국의 부처에서 국가대표로 기구에 나와 있는 사람이거나 기구 직원이라면 최소 디렉터급 이상이 아닌 다음에야 연차회의에 올 일은 (이번처럼 해당 세션을 직접 준비하는 팀이 아닌 이상) 없기 때문이다. 불현듯, 오늘 같은 하루가 바로 내가 소싯적에 막연하게 환상을 가졌던 국제기구에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진행되었던 ‘모의 UN’ 같은 행사의 포스터를 보면서 (직접 참여는 못 해봤다), ‘국제’ 자가 들어간 이런저런 과목들을 수강하면서, 그리고 20대 중반에 떠났던 미국 여행에서 친구와의 UN본부 투어 중 텅 빈 회의실을 바라보며 상상하던 광경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각국 대표들이 나와 무언가를 열심히 토론하고, 나는 그 현장 어딘가에서 주인공으로 앉아 내 일을 열심히 하는 그런 모습. 당시의 나는 현재의 내가 비록 복사기 옆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그래도 파릇파릇하던 때의 내가 꿈꾸던 하루를 현재의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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