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인연일까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10화(완결)

by 자자카 JaJaKa

어느 순간부터 기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술이 들어갈수록 기주는 조금씩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술을 마실 무렵에는 얘기를 들어주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면 술이 취한 지금은 자기 말을 쉼 없이 쏟아내었다. 상대방이 얘기를 듣고 있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자신이 하는 얘기에 점점 심취해 가는 듯 보였다.


들어보니 사실 별달리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기주가 군대에서 겪었던 힘들었던 병영생활 이야기, 학창 시절 때 경험했던 이야기, 직장 내 인간관계 등이었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면 즐거웠던 일보다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술이 어느 정도 이상 들어가면 누군가가 스위치를 켠 것처럼 생각이 났고 그것을 입 밖으로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먹고 그 이상은 술을 자제하면 좋으련만 술이라는 것이 어느 선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술이 나를 마시는지도 모르고서 기계적인 움직임에 따라 술잔을 입에 가져가서 그냥 들이붓는다.


주하는 기주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군대에서 겪었던 일들을 들으면서 남자들은 참 군대에서 별별 일들을 다 겪나 보구나, 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마치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 것처럼 기주의 얘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얘기했다는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또 하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반복해서 같은 얘기를 했다. 마치 처음 얘기하는 것처럼 감정을 토로하면서.


혀가 꼬인 목소리로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주하를 쳐다보며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기주를 보며 기주의 첫 번째 주사가 무엇인지 주하는 알게 되었다. 아 저거구나, 안과장의 주사 중의 하나가.


반복된 얘기를 하던 기주가 어느 순간 감정이 격해졌는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주하는 순간 멈칫했다.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의 주사가 바로 술 먹고 질질 짜는 것이라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데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기주가 울고 있다. 여자가 술을 먹고 질질 짜는 것도 볼썽사나운데 남자가 술을 먹고 질질 짜는 모습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왜 울어요?”


기주는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면서 울먹거렸다.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흑흑흑, 참을 수가 없어요. 내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어요. 난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너무 억울해서, 흑흑흑.”


“사람들 보잖아요. 그만하세요.”


기주는 주하의 말에 오히려 소리까지 내면서 눈물을 흘렸다. 술을 먹고 앞에서 질질 짜는 기주의 모습을 본 나영은 어떤 얼굴이었을까? 원래 술주정이라면 치를 떨 만치 싫어하는 나영이가 여자도 이런 모습을 보이면 싫은데 남자가 이렇게 질질 짜면서 주저리주저리 앞에 앉아 말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면 그 아무리 잘생긴 배우가 앉아있더라도 싫다고 했을 것이다.


술 먹고 질질 짜는 기주를 보며 기주의 두 번째 주사가 무엇인지 주하는 알게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술 먹고 우는 남자라.


주하는 기주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저리주저리 말하며 질질 짜는 모습을. 그렇게 괜찮은 남자가 이렇게 바뀌어 갈 수 있음을.

차라리 이 남자가 술을 못 마셨더라면, 그럼 벌써 나영이가 채어 갔겠지.

앞에서 우는 기주를 한동안 바라보던 주하가 어떤 마음의 결심을 한 듯 그에게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세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만하세요.”


기주가 어떤 분위기를 느꼈는지 잠깐 고개를 들어 주하를 살짝 쳐다보았지만 이내 다시 흐느꼈다. 뭐가 그리 서러운 것들이 생각이 나는지. 그것도 오늘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주책도 이런 주책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맞은편에서 기주를 바라보던 주하가 낮게 읊조렸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주하가 마음의 결심을 한 듯 엉덩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하가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는지 기주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하를 바라보는 순간 주하의 몸이 기주 쪽으로 살짝 숙여지면서 그녀의 오른손이 머리 뒤쪽에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와 허공을 가르고는 정확하게 기주의 왼뺨을 향해 날아갔다.

주하가 중학교 때 배구선수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키가 자라지 않아 고등학교에 가서 배구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만약에 키만 제대로 자라주었다면 아마 배구선수로 계속 활동을 했을 것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오던 주하의 오른손바닥이 기주의 왼뺨에 닿자 곧바로 짝, 하는 소리가 아닌 철썩,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고 기주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급격하게 돌아갔다.

갑작스레 싸대기를 맞고 옆 기둥으로 몸이 쓰러진 기주가 놀란 눈으로 입이 떡하니 벌어진 채 왼손으로 자신의 왼뺨을 만지면서 눈앞에 서 있는 주하를 쳐다보았다.


마치 넋이 나간 눈빛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주하를 쳐다보는 기주를 보며 주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을 들었다. 주하가 소주병을 드는 것을 본 기주가 기겁을 하면서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방어하려고 했다.


손가락 사이로 주하를 쳐다보는 기주의 눈빛에서는 술이 이미 다 깬 것처럼 보였다. 기주의 왼뺨에는 선명하고 발갛게 부풀어 오른 주하의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주저리주저리 거리지도 질질 눈물을 짜지도 않고서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눈빛으로 주하를 쳐다보는 기주를 향해 주하가 소주병을 들고서 천천히 말했다.


“자, 한잔 받아요.”


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놀라고 당황한 눈빛의 기주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잔을 잡자 주하가 기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잔에다가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콸콸콸 따르던 술에 기주의 잔이 넘쳐흘렀지만 주하는 술을 따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술이 흘러넘치는데도 주하와 기주의 눈빛은 서로 떨어질 줄 몰랐다.



-끝-





지금까지 소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소설은 2020년 9월에 쓴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