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9화
기주는 살짝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이미 집에 간 나영을 잠시 언급하더니 술병을 들어 주하의 잔에다가 가득 술을 따라주었다. 잔을 부딪치자마자 단숨에 원샷으로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은 기주의 눈은 반쯤 풀려있었다.
“약속이 어그러져서 그냥 집에 들어갈 뻔했는데 함께 가자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술이 아주 다네요.”
“별말씀을요. 안과장님하고 이렇게 술을 마시게 되어서 저도 너무 즐거운데요. 근데 조금 취하신 거 아니에요?”
기주가 눈에 힘을 주면서 최대한 크게 뜨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기주의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기주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아니에요. 아직 멀쩡합니다. 제가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도 여자보다 술이 약하겠어요? 끄떡없습니다.”
주하는 참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꼭 여자보다 술을 잘 마셔야 한다는 생각, 남자는 여자보다 술이 세야 한다는 생각, 술 앞에서는 남들보다 무조건 더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알코올 해독 능력이 떨어져 보통의 남자들에 비해 술이 약하다고 해서 모든 여자가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남자는 당연히 여자보다 술을 더 잘 마시고, 더 잘 마셔야만 하고, 더 잘 마시는 신체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남자 중에도 술이 약한 사람이 있고 여자 중에도 술이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한다. 마치 여자보다 술을 못 마시면 남자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주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목격하고는 했다.
“안과장님은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주량요? 글쎄요.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달라서. 몇 병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남들이 물어보면 보통 소주 두 병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시구나.”
“주하씨는요? 주하씨 주량은 어떻게 돼요?”
“저는 보통 소주 네 병 정도면 기분 좋게 취하는 것 같아요.”
주하의 말에 기주의 게슴츠레한 눈이 순간 커졌다.
“소주 네 병?”
주하는 기주의 표정변화를 살펴보았다. 보통 남자들이 주하나 나영의 주량을 들으면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와, 대단하시네요, 하면서 인정하고 물러나거나 진짜? 그렇게 잘 마셔? 한번 내가 상대해줘 봐? 하고는 무슨 경쟁상대를 만난 듯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여자가 술을 잘 마시는 게 뭐 어때서.
“나도 컨디션만 좋으면 그 정도는 너끈히 마시는데. 내가요, 한창나이 때는 소주를 궤짝으로 옆에 두고서 친구 서너 명이랑 마시고는 했어요.”
남자들은 술을 마시는 것에 있어서 허풍 떨기를 좋아한다고 할까, 마치 술을 못 마시는 것이 무슨 대단한 흠이고 술을 잘 마시는 것이 무슨 대단한 자랑처럼 생각하는지 옛날에 모두가 다 한 술 한 사람들뿐이다. 드럼통으로 마셨다느니, 몇 말은 기본으로 마셨다느니, 궤짝으로 쌓아놓고 마셨다느니, 술을 마시다가 배가 터진 사람도 봤다느니 등등등.
살짝 왼쪽 눈을 껌뻑거리기 시작한 기주가 푸우, 하고 숨을 크게 내뱉고는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이미 기주가 술에 취한 것 같아 그만 마시면 어떻겠냐고 주하가 기주에게 말해보았지만 이미 술이 기주를 마시고 있는 상태인 듯 기주는 계속 끄떡없다고 이제 시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제 시작이 아니라 거의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아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