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3. 서울인쇄센터 일지 6
최근 들어 도심 재개발에 대한 소식들이 자주 들린다. 2006년 세운상가 녹지축 얘기부터 2015년 도시재생을 지나 2022년 다시 재개발 이야기가 들리니 지난 십여 년 사이에 세 번째 큰 전환을 맞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느 계획을 막론하고 도시를 뒤덮은 청사진에서 지금 이 도심을 채우고 있는 도심 제조업과 그 종사자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때마침 이곳 도심 제조업의 현황과 그 가치를 진단한 책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인 ‘서울 도심에 영세공장이 왜 많을까’는 그 안엔 많은 질문을 담고 있다. 도심에 정말 영세 공장이 많은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정말 영세한가? 그럼 땅값이 비싼 이 도심에 왜 영세공장들이 모여 있을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차례로 확인한 다음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 우리의 판단에 참고할 유용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공장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도심에 영세공장이 밀집해 있는지는 통계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통계청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종로구와 중구에 있는 제조업체는 13,480개소로 서울 전체 제조업체 57,321개소의 23.5%에 달한다고 한다. 종사자 수는 42,081명으로 서울시 전체 대비 15.9%를 차지하고 있다. 세운상가 일대로 영역을 축소해 보면 서울시 인쇄업의 45.4%, 기계, 정밀의 20.3%, 공구의 14.2%, 전기, 전자의 13.6%, 조명의 6.5%가 이곳에 밀집해 있다고 한다.
이들 제조업체의 종사자는 평균 2명이고, 사업장 면적은 인쇄업이 평균 56.5m2, 여타 제조업은 이보다 작은 39.3m2로 나타나고 있어, 규모나 점유 형태로 볼 때 ‘영세한 공장’들이 도심에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영세한 공장들이 비싼 임대료를 물면서 도심에 모여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도심 제조업 공장의 대부분 단일 공정으로 전문화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쇄, 출판업종은 70.6%가, 여타 제조업종은 62.5%가 단일 공정으로 전문화되어 있다. 그 때문에 공정 간 주문이 활발하다.
저자가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인쇄, 출판업종의 경우 세운상가 인근에서 주문받는 경우는 38.4%, 세운상가 일대에 주문을 내는 경우가 81.7%인데, 이는 서울시와 그 외부 지역에서 폭넓게 주문받아 도심 집적지 내에서 대부분의 공정을 소화한다는 이야기이다.
인쇄물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공정별로 전문화된 공장들 여럿을 거쳐야 한다. 반제품과 선행공정에 대한 정보가 이 공장들을 거치면서 인쇄물 하나가 완성된다. 충무로 인쇄 단지 자체가 거대한 인쇄소인 셈이다. 이것이 영세공장이 ‘모여’ 있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다. 공정을 어떻게 연결하고 배합하느냐에 따라 생산라인의 역량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이곳 일대엔 이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획’ 기능을 수행하는 그룹이 일정 정도 꾸준히 성장해 왔다.
저자는 ‘아이디어만 가지면 제조 기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생산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책 p60)’라고 얘기한다. 이곳 일대에 오면 탱크도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방대한 생산 네트워크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이렇게 아이디어를 ‘구현’하도록 공정을 조합해주는 ‘기획자, 기획사’들의 존재를 암시한다. 여기에 이들 ‘영세공장’이 굳이 땅값이 비싼 ‘도심’에 왜 모여 있으려고 하는지가 드러난다.
인쇄, 출판업과 같은 ‘대면 접촉 지향(the communication-oriented industries)’ 업종은 도심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입지 불이익을 극복하고 있다는 주장. 그것은 이들 업종이 비표준적인 생산, 비표준적인 재료, 아이디어와 정보를 위해 사람들과의 접촉과 고객에 대한 개인적인 접촉의 필요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Chapman and Walker, 1991, 이 책 34p에서 재인용)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경향은 다른 제조업도 비슷하다. ‘옷감의 질이나 색상 등 제품의 질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패션업도 대부분 영세하게 운영되는 봉제 공장을 곁에 둬야 하는 이유다.
어디를 가나 ‘창의’ ‘창조’ 소리를 듣는 요즘, 그 ‘창의’를 구현하기 위해 곳곳에 ‘메이커 스페이스’를 세우고 있는 요즘, 지난 반세기 동안 실제 산업의 초입에서 그 역할을 해 온 곳이 바로 이곳 도심 제조업체들이다. 그러나 지금 재개발의 논의들은 이 업체들이 단지 외양이 작고 낡았다고 ‘영세공장’으로 분류하며 없애야 할 대상으로 규정짓는다.
이곳에 대한 재개발 계획은 197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0년을 훌쩍 넘은 시간을 재개발과 재생 사이에서 정부와 시민들이 고민했다면 이제는 원주민 재정착률이 떨어지고, 지역 산업을 고려하지 않는 등의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는, 좀 더 지혜로운 방법으로 상생을 모색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한다.
다행히 이 책을 비롯해 그간 도심 제조업을 조명한 연구와 책들이 적지 않다. 이런 연구들이 이런 논의에 포함되어 폭넓은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을지로와 세운상가에 대한 흥미로운 제안도 책의 마지막에 덧붙이고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찾아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