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몸은 행운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시작했다는 인간의 운명이 수백만 년을 지나 내게로 이어져 오기까지, 반드시 내가 이 세계에 출현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어떤 철학자가 말한 대로 나는 이 세계에 그냥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던져진 사실에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인생은 내게 주어졌다. 내게는 삶을 시작하는 힘이 주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중년을 넘겼다. 언제부턴가 봄이 오면 목련과 벚꽃이 피고 지는 광경을 보면서 화려함과 함께 씁쓸함을 느끼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생각이 더 크다. 나는 아직 앞으로 펼쳐질 삶을 기대한다. 무엇으로 채울까? 무엇이 남았을까? 인생에 대한 상상을 해 본다.
상상은 미래를 미리 그려보는 작업이다. 무엇을 원하는지를,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인생에서 상상은 항상 있어 왔다. 상상은 삶의 방향에 대한 의문과 충만한 삶에 대한 욕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의 나는 가족의 돌봄을 받으면서 주어진 환경에 충실한 삶을 살았지만-그래 봤자 공부하고, 친구들과 공차며 놀고, 가족들과 부대끼며 지냈다- 많은 상상을 했다. 셜록 홈즈처럼 멋진 탐정으로 활약하는 나, 축구선수가 되어 멋진 골을 넣는 나, 많은 돈을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나를 상상했다. 청년기의 나는 기업에 들어가 전문가로 자격을 인정받고, 어려운 일을 잘 수행하고, 상사에게 인정받으며 쭉쭉 성공가도를 달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나를 상상했다. 지금 나는 중년기를 넘어 다시 상상한다. 그런데 지금 하는 상상은 다르다. 무척 다르다.
상상은 감정과 함께 온다. 깊게 상상하면 미래에 내가 느낄 감정까지도 그릴 수 있다. 중년을 넘은 지금 하는 상상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이전에는 미래를 상상할 때, 확고한 자신감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흥분, 설렘이 있었다. 현재 하는 상상은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온다. 흥분과 불안, 두려움이 섞여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미래의 그림 속에 과거를 반추하는 생각이 섞여 있다. 청년기의 상상은 위로 상승만 했다면 현재 하는 상상은 상승기류와 하강기류가 섞여 있다. 왜 그럴까?
상상 속에 회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본 풍경이나 경험을 상기하는 회고는 기억을 주소재로 하고 그리움이나 회한, 후회 또는 자책의 감정으로 종종 이어진다. 본래 미래의 상상은 흥분과 희망 같은 감정이 우선 따라온다. 미래에 하고 싶고 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지각하게 되고 의욕이 샘솟기 때문이다. 나는 상상에 이어지는 이런 감정이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무엇인가 시도하는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나의 상상은 미래와 과거를 양팔에 껴안고 있다. 희망과 함께 불안과 두려움이 따라온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낙관론자다. 그가 말한다. "아직 할 일이 많아, 몸도 건강하고 말이야. 아직은 시간이 있어. 네가 전에 꿈꿨던 일 기억 안 나니?". 그런데 회의론자가 말한다. "그런 것은 이미 해 봤잖아? 새로운 것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잘 마무리해야지. 그 일이 잘못되면 어떡할래? 시간이 그렇게 많아?".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 말은 바라는 기대의 실현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과거는 사실이고 경험이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그래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지나온 여행지에서 겪어왔던 좋았거나 불쾌한 경험이 남게 되고 특히 불쾌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삶의 교훈과 지혜가 담겨 있기도 하다.
감정은 의무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감정을 내가 만들 수는 없다. 감정은 내가 경험한 대상, 혹은 상황에 대해 내가 숨길 수가 없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가짜 감정이란 없다. 과거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진실한 것이다(과거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뿌듯함, 감사, 만족감도 있을 수 있다). 상상 속에서 내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해 느끼는 희망과 흥분도 진실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삶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고 충만한 삶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상상은 경험을 거친, 성공과 실패로 부를 수도 있는,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로 인한 후회 혹은 연민을 담은 기대가 된다.
내가 지금 인생에 기대하는 상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과거의 상상은 직진이었다. 우회로는 없었고 후진하는 일도 없었다. 삶에서 무엇인가 주어지는 것을 기다리기 보다는 만들려고 했고,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었다. 이제 내가 하는 상상은 인생에는 직진말고도 후진, 교차로가 있음을 알고 하는 상상이고 내가 반드시 주인공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미래를 상상한다. 더욱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대는 항상 실망을 친구로 초대하지만 삶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후회와 연민은 그저 그것으로 남을 것이고 인생이 무료해지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미래를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나의 심장은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다. 청년의 심장에 비해서는 조금 느리게 천천히 뛰는 것 같지만, 그렇게 느낀다. 다만, 나의 심장은 흥분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면서 뛰고 있다. 심장이 뛰기 때문에 상상하는 걸까? 아니면 상상하기에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일까? 이 심장은 나의 손과 발에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