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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Jan 21. 2022

애매한 재능의 딜레마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안다는 것에 대하여


작년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부랴부랴 몰아치듯 글을 써서는 마감날에 가까스로 지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수상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이 벽 높은 브런치에서 이렇게 숙제하듯 몰아서 쓴 원고가 채택될리는 만무하니까. 그럼에도 나는 마치 로또 번호를 쥐고 일주일 동안은 행복할 수 있는 소시민처럼 기다리는 시간을 꽤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출간한 책은 총 7권. 그중에 중국어 교과서 한 권, 중국어 회화책 한 권을 제외하고 5권이 모두 여행서였고, 두 권은 오랫동안 장수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게 난 교사를 하면서 퇴근 후에는 블로그를, 주말에는 책을 쓰는 삶을 10년도 훌쩍 넘게 이어왔다. 어디 그뿐일까. 호기심천국 열정러 ESTP답게 상담심리에 관심을 갖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고, 10년 가까이 걸려 기어이 꾸역꾸역 박사 논문까지 끝냈다. 그리고 지난 달, 청소년상담사 1급 자격증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교육심리 공부는 해피엔딩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어쩌면 살면서 지금껏 운좋게도 바라는 일은 대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좌절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나, 관심을 갖고 바라고 도전한 일들이 결국 실패로 끝난 적은 없었다.

비록 천재적 재능은 아닐지라도 호기심천국 열정러 ESTP의 사방으로 뻗어있는 안테나가 닿을 수 있을 만큼의 애매한 재능과 적당한 운은 갖고 있는 덕분에 N잡러로서 나름 오랫동안 선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딱 하나, 애매한 재능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있다.

그건 바로 에.세.이. 출.간.

에세이 출간은 거의 10년 넘게 가져온 나의 최대 버킷리스트였다. 여행책을 다 쓰고 나면 여행 에세이를 써야지,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심리 관련 에세이를 써야지, 교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면 교육 관련 에세이를 써야지, 늘 그렇게 에세이 출간의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당신 글은 참 술술 읽혀요.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써요?" 칭찬해줄 때마다 으쓱해서는 "이젠 에세이를 낼 거예요!" 말하며 눈을 반짝이곤 했다. 언젠가는 글로 먹고 살겠다는 야무진 상상을 하며 행복했더랬다.

하지만, 그런 꿈 같은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나 스스로도 기획서를 내거나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에세이 출간 의뢰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전, 청소년상담사 1급 합격까지 모두 끝내고 마음이 한껏 가벼웠던 어느 날. 문득 이젠 에세이 출간에 적극적으로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 김에 아는 편집자님에게 작년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응모했던 원고를 보내 피드백을 부탁했다. 기획서 제출용 원고를 다시 쓰는 게 맞았겠지만, 성질 급한 나는 일단 피드백부터 받아보고 싶었다. 물론 "출간합시다!!"라는 드라마틱한 답변을 기대하진 않았다. 단지 모르는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면 아예 피드백조차 받지 못하거나 두리뭉실하고 완곡한 거절만 듣게 될 것 같아서 굳이 아는 편집자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며칠 후 도착한 편집자님의 피드백은 몹시 날카로웠고 단호했으며 명확했다.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셨으나 그 행간의 의미까지 고스란히 읽혀졌다. 나의 간절함이 느껴진 건지 아예 "넌 절대 안돼"까지는 아니었고, 앞으로 이런 이런 방향으로 써보는 게 좋겠다는 권유와 조언이 포함된, 애정이 담긴 피드백이다.

하지만, 그 메일을 찬찬히 읽고 나니 '이 꿈은 이제 내려놓아야겠구나. 내 능력과 재능은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 애매한 재능으로 에세이 출간은 욕심이겠다는 현타가 왔다. 물론 지금까지 책을 출간한 경력이 있으니 출판사 리스트를 뽑아서 메일을 돌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기회를 모색하면 어찌어찌 운좋게 작은 출판사에서라도 출간의 기회를 찾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책을 쓴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진 않다. 그건 정말이지 로또를 사는 기분일 것 같으니까. ;;


돌이켜보면 살면서 지금껏 애매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일은 운좋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젠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할 때가 왔예감묵직하게 찾아왔다. 내가 지닌 애매한 재능으로는 섬세한 감성, 남다른 창의성, 트렌드를 읽는 기획력, 깊이있는 사유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살다가 어느날 문득 거짓말처럼 출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건 정말 내 인생에서 더없이 기쁜 일이겠으나, 그런 기적은 그저 로또 같은 거라 여기며 에세이 출간의 꿈은 당분간은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자존감은 나를 스스로 높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될테까. 이젠  재능의 얕음과 애매함 기꺼이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존감을 배워야 할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써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고 백수린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게 기억난다.

그 말이 애매한 재능을 가진 나같은 사람에게도 언젠가 적용될 수 있을런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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