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획자의 정체성
1.
지난 8월. 20년 된 고등학교 친구가 결혼식 축사를 부탁했다. 직업 특성상 글을 쓰는 것은 익숙했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도 저항감이 없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축사란 형식의 글은 처음이었기에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꽤 오랜 퇴고 시간이 필요했다. 긴 시간을 함께한 우리의 추억,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장점, 앞으로의 삶을 축복하는 이야기들을 정리하며 이 축사가 부디 그녀의 결혼식을 빛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것을 받게 된 것이었다. 친구는 결혼식이 끝난 직후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도 축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은 하객들의 반응을 내게 전해주었다. ‘감동적이었다, 눈물을 흘렸다, 글을 참 잘 쓴다, 목소리가 좋더라’ 나조차도 더 이상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의 어떤 면모들이 선물처럼 전달되었고 나는 다시 찾은 나의 조각들을 다정히 끌어안았다.
2.
“기획 프로듀서라는 건 처음 들어봤어요.”
데스커 라운지 ‘워크 투게더’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말했다. 특별한 반응은 아니었다. 제작자, 제작사의 대표, 프로듀서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간 ‘기획 프로듀서’로 스스로를 명명했던 것은 운 좋게도 업계 첫 커리어를 ‘영화기획팀’에서 시작하게 되어 기획자로써의 마인드를 가졌던 것도 있지만, 다양한 업계의 다양한 직종이 ‘피디’로 불리고 있었기에 나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의 일은 단 한 줄의 로그라인에서 시작해 작품을 제작하여 대중을 만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기획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기획 프로듀서도 하나의 작품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가 무색하게 나는 아직 전 과정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주로 내가 가장 많이 투입되었던 부분은 제작에 들어가기 전 단계인 기획 개발 단계였고, 그러다 보니 늘 크레딧에서 잊힌 유령이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간 내가 기획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 언제일까 떠올려보면 주체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보였을 때보다는 주어진 작품의 기획 개발 단계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였다. 지나온 모든 회사는 하나같이 문제가 되는 프로젝트를 내게 맡겼다. 시작부터 문제였건, 과정 상의 문제였건 나는 언제나 돌파구를 발견하여, 논리적인 근거로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다음으로 진행시켰다. 물론 억지로 한 일은 아니다. 회사에서 맡기는 프로젝트들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게임의 미션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그런데 올봄부터는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그저 남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냄새난다고 욕먹고, 제대로 안 치운다고 욕먹고, 치우고 나면 누가 치웠는지 딱히 관심도 없는 그런 일. 버석버석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매일 밤, 그런 내게 물을 주며 흠뻑 적셔주는 앤드엔 스터디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금이 쩍쩍 갈라져 부서지고 말았으리라.
3.
앤드엔 스터디를 통해 채자영님과 김도영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어쩌면 올해의 가장 큰 전환점이 아닐까 싶다. 채자영님은 컨티뉴어스 세미나에서 김도영님은 데스커 라운지의 워크투게더에서 소중한 인사이트를 많이 나눠주셨는데 두 분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공통적으로 내게 와닿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는 메시지였다.
모든 것의 시작은 정체성이라고 말한 자영님의 강의에서 가장 와닿았던 문장은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언어의 결을 찾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이를 잘 표현한다면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렇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일을 넘어서서 한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도영님의 워크투게더에서 깊이 공감했던 것은 '브랜드가 차고 넘치는 세상인데 왜 매일 새로운 브랜드가 탄생하는 걸까? 아직도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였다. 이 말은 곧 '이미 세상에 나올 만한 이야기는 다 나왔는데 나는 왜 또 이야기를 만드는가?'로 질문했을 때도 같은 대답으로 귀결된다.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신기해요. '기획을 잘한다'는 것에 대한 정답은 아직 못 찾았어도 '좋은 기획자'에 대한 자격은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한때 저의 팀장님이었던 분이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좋은 기획이 나오려면 다양한 스타일의 기획자가 많아져야 하는 것 같아. 각자 다른 무기 하나씩 들고 싸울 수 있는 기획자들 말야."
다들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그걸 바탕으로 본인의 기획력을 펼치게 되죠. 이 스타일이란 것이 그저 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만의 강점이 될 때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스타일의 기획자이며, 내 기획력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일까?' 저 역시 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늘 그 끝에는 '책'이라는 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사실 각자의 스타일이 분명해지고 또 다양해지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평범한 것도 더 이상 평범해지지 않는 마법이 일어나는 거죠.
- 기획자의 독서, 김도영
4.
어떤 일들은 이제 더 이상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간 쌓인 경험들로 직관은 선택이 필요한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활약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다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알을 깨야 했다. 지난달에는 내 문제를 누군가 해결해 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점점 내가 깨야만 하는 세상이 점점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세상은 바로 누군가에게 쓸모를 인정받고자 살아왔던 나의 모든 시간들이었다. 나는 적당한 가격에 꽤 요긴하게 쓸만한 재목이었다. 그것은 나의 커리어라는 자부심이 되기도 했지만, 뒤집어보면 타인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고 나를 재단하게끔 내버려 둔 것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너도 오면 좋은데 오늘은 안될 것 같다. 지금 ㅇㅇ대표가 네 욕을 한창 하고 있어."
'저도 그 사람 맘에 안 들어요. 어쩌라고요.'라는 반응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참 나약하게도 상처를 받고 말았다. 사실의 진위도 파악할 생각 없이 술자리 안주 마냥 욕을 해대는 사람도, 이를 태연하게 전하는 사람도, 이 사실에 상처받는 스스로도 모두 나를 아프게 했다. 그때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말이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그 허상에 이토록 오랫동안 고삐를 잡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매달려 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을 품에 안고 있었기에 또 사람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또 내려놓는다는 것이 지는 것만 같았고, 약하게 구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인연과 하늘의 이치가 그렇듯 다 때가 있는 법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끝끝내 끌어안고 있었다.
욕을 먹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욕을 먹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데 봄부터는 그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한계가 오자 주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도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굽히고 싶지 않은 신념과 일의 방식이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마지막에 찾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였다. 가장 중요한 것, 다음으로 향하는 열쇠는 나의 정체성 그리고 기획자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었다.
5.
"피디님의 메일을 받고, 피디님이 작성한 문서를 열 때 항상 긴장하게 돼요. 피디님은 얼마 안 걸렸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피드백 잘해준다고 하셨을 때, 사실 이 정도 일거라고 예상 못했습니다. 너무 자세히 해주셔서 놀랐습니다. 다음 것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친구의 결혼식 축사를 하며 다시 발견한 나의 모습처럼 흩어 놓은 나의 조각들을 다시 그러모아 본다. 그간 나는 스스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남이 쉽게 짓밟을 수 있게 길바닥에 놓아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어리석음이 마부에게 부림 당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의 대사를 떠올려 본다. 말도, 마부도 아닌 주인이 될 거라는 피 끓는 대사를.
새 술은 새 부대에. 이제는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사람들을 위한 작품을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집중하여 그 누가 뭐라든 지켜나가고 싶다.
8월 마지막 주. 더글라스 하우스에서 숙박하며 오랜 숙제였던 나의 정체성과 일에 대해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보고자 했다. 나를 표현하는 100개의 키워드에서 내가 건져 올린 하나의 키워드는 '야망(野望)'이다. 들판 야에 바랄 망으로, 국어사전에는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이라고 쓰여 있지만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들판을 바라보다에 가깝다. 이를 내 식으로 정리해서 만든 한 문장과 기획 수업에서부터 고민하기 시작한 내 일의 가치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나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라는 사람 = 척박하지만 기회가 도사린 황야에서 즐거움과 경이를 발견하고 싶은 사람
나의 일 = 자신의 삶을 잠시 벗어두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꿈과 모험을 파는 일
이미 부서지기 시작한 세계는 되돌릴 수 없다. 이제는 완전히 깨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출발선에 서야만 하는 때가 도래한 것이라고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