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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꼰대 Jun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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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속의 뇌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걸 가져다준다. 특히 어느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은 반례를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부서지기 힘들다.






통 속의 뇌를 도식화한 그림

‘통 속의 뇌’라는 말이 있다.


1981년, 철학자인 힐러리 퍼트넘이 제시한 개념인데, 인체에서 뇌만 떼어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통에 넣은 뒤, 뇌를 자극하는 전기 자극을 컴퓨터를 통해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것이다. 기존의 뇌가 뉴런의 전기 자극을 통해 신경을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과 달리, 뇌가 컴퓨터 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 속에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 속의 뇌는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세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 달리 말하면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뇌도 어쩌면 ‘통 속의 뇌’ 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는 증명 또한 어려우니 말이다. 만약 그 반박이 충분히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다 하여도 그 역시 외부의 자극일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을 다 아는 이가 어디있을까.


 퍼트넘 이전, 데카르트는 컴퓨터 대신 악마에 의해 철저히 조작된 정보가 개인의 자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 실험을 제시한 바 있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악마 가설’이다. 이처럼 ‘통 속의 뇌’와 비슷한 개념은 여러 사람이 생각했던 개념이다. 평행우주나 시뮬레이션 우주 등의 개념도 큰 틀에서는 이와 비슷할 수 있다. 나도 어릴 때, ‘사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쩌면 그냥 장난감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쩌면 지금 숨 쉬고 있는 내가 죽어도 또 다른 내가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치원생이 생각할 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가 바로 ‘통 속의 뇌’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통 속의 뇌', 여긴 아예 통 속의 몸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창작물에서 통속의 뇌는 하나의 클리셰로써 사용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화 매트릭스이다. AI가 지배하는 미래 세상 속에서 인공 자궁 안에 갇혀 에너지로 쓰이며 뇌 속에 입력된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잔인한 현실과 행복한 거짓 속에서 네오가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고르는 장면을 통해 퍼트넘이 생각했던 철학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수술대 위에서 나는 통속의 뇌를 경험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취된 몸과 달리 꿈속에 있던 내가 깨지 못하는 꿈 속에서 계속 지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꿈인 줄 알면서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지옥 같았다. 시간이 제법 흘러 모든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장 먼저 꾼 꿈의 기억은 색을 만들기 위한 나비였다.


 뷰티 브랜드인 입생로랑의 립스틱 색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나비처럼 허리를 굽히고 발레를 하듯 검은 색 바닥을 돌아다니며 색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 각자의 색이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과 충돌하면 색이 조합되는 색이었다. 나는 흑갈색의 짙은 호피무늬가 새겨진 흰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죽을 지경이었다. 나비를 흉내내다보니 허리를 굽힌 채 다른 사람과 부딪치고 마주하기를 수십 차례였다. 색이 바뀐다고 내게 좋을 것도 없었다. 눈을 돌려 보면 모두 표정도 없었고 웃음도 생기도 무엇도 없었다. 그저 색을 만들기 위해 쉼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어서 불평을 토로하자, 파랑 옷을 입은 단발의 여자 직원들이 위에 보고를 해주었다. 그러자 안경을 쓰고 마른 관리자가 나와 내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는 생머리였고 빨간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면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라고 하였다. 다른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는데 몸은 자유롭지 않은데, 큰 전시회나 세션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 정신만 이식하고 활동하는 것이었는데 재벌이나 셀럽의 경우, 일이 바빠 모든 자리에 참석할 수 없어 그들의 가짜 신체에 내 정신만 주입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른바 '카케무샤'와도 맥이 닿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셀럽도 아니었고 셀럽을 대신해 업무를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특히 37층 정도의 높이의 빌딩에서 계속 사람들과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영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행동은 자유롭지 않았다. 다리 하나 움직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 부자유 속에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서야 약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대신 모두 외국사람들뿐이었고 그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먹는 초콜릿이나 음료 등을 나는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 위로 시원한 스파클링 녹차가 보였고 오렌지맛 사탕이 보였다.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 입 안에 상쾌함을 밀어넣고 싶을만큼 모든게 갑갑했다.


이게 끝나면 집으로 돌려보내준다고 관리자에게 듣기는 했지만, 그들은 끝나도 계속 나를 내몰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날갯짓을 하였고 카케무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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