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종이 위에 펼쳐진 두 개의 얼굴은 분명 같은 인물임에도,
그 표정은 마치 한 폭의 그림에 갇힌 두 개의 다른 영혼처럼 저마다의 언어로 속삭인다.
에곤 쉴레의 <이중자화상>(1915)은 단순히 한 화가의 초상을 넘어,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상반된 자아의 투명한 단면을,
그리고 그 갈등 너머에 도달할 수 있는 미묘한 화해의 순간을 포착한 기묘한 작품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얼굴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아래쪽의 자아는 시선을 경직되게 한 점으로 고정시킨 채,
응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인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는 세계와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적의나 고통스러운 내적 갈등의 표정이다.
반면, 그를 감싸듯 위에 포개어진 다른 자아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아래의 고통받는 자신을 바라보는 듯,
혹은 관찰자인 나를 응시하는 듯한 그 표정에는 강렬함 대신 일종의 관조와,
심지어는 다소 익살스러운 호기심이 스민다.
마치 격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아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 같다.
이러한 ‘이중성’은 쉴레에게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1910년 전후부터 지속적으로 이중 자화상을 제작하며,
마치 자아의 분열을 인지하고 이를 시각적 실체로 부여잡으려 했다.
당시 빈이라는 도시 자체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화려한 마지막 빛과
전운(戰雲)의 불안이 공존하던 터전이었고,
쉴레는 그곳에서 ‘솔직하고 대담한 에로틱’으로 자신의 욕망과 고독을 마주했다.
외부의 시련보다는 자신 내부의 풍경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으며,
이 작품은 바로 그 내적 풍경의 지도라 할 수 있다.
한 전문가는 이를 ‘의식으로서의 쉴레’와 ‘잠재의식으로서의 쉴레’의 병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단순한 ‘분열’의 보여주기가 아니다.
그것은 분열된 두 자아가 서로를 인정하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감싸며,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통합되는 순간을 포착한 데 있다.
아래의 격렬한 자아는 선과 색채가 강렬하고 입체감이 두드러져 실체감이 넘친다.
그런데도 오래 바라보면,
오히려 위의 관조적인 자아의 평면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는 쉴레가 궁극적으로 강조하려 했던 것이 분노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내부의 소음을 포용할 수 있는 ‘자애(自愛)’의 시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애는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다.
1910년 연인 페슈카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유명한 문장은 오해받기 쉬운 나르시시즘의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중자화상>과 함께 읽을 때,
이 말은 자신의 빛나는 면만이 아닌,
고통스럽고 충동적이고 분열된 모습까지 포함한 ‘전체’로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용기 있는 결의로 다가온다.
위의 자아가 아래의 자아의 머리에 볼을 갖다 대고 있는
그 긴밀한 접촉은 적대나 관찰이 아니라,
위로와 수용의 제스처다.
그들은 “서로의 고독에 기대”어 홀로 선 싸움을 멈추고,
비로소 ‘쓸쓸함의 작은 둔덕’을 함께 쌓아 올리는 중이다.
에곤 쉴레는 이 그림을 그린 지 3년 후인 1918년,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불꽃처럼 강렬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중자화상>에서 우리는 그 혼란의 진정한 중심,
즉 상반된 감정들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결국 자신 전체를 포용하려는 인간 내면의 끈질긴 노력을 본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 안의 분노하는 자아와 관조하는 자아,
약한 자아와 강한 자아는 오늘도 조용히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이 위대한 화가가 보여주듯,
서로를 알아보고 기대어 더 넓은 하나의 자아를 만들 용기가 있는가.
진정한 ‘나의 훌륭함’이란, 빛나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 그림자까지 함께 끌어안는 데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