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어제 아파트 관리실로 전화를 했다.
kbs 시청료를 전기요금에 통합 징수 한다는데,
우리 집은 TV 전혀 안 보고 OTT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안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TV를 안 봐도,
TV만 있어도 내야 한다는 것이 법이란다.
그것이 고장 난 TV라도...
한때 저녁 8시면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TV를 시청하던 시대가 있었다.
35%를 넘나들던 시청률,
방송국 PD는 선망의 직업이었고,
공중파 뉴스는 진실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2025년 현재,
공중파 방송은 급격한 추락의 늪에 빠져 있다.
10%의 시청률만 넘어도 대박이라 불리고,
20대 중 절반도 TV를 보지 않는 시대.
무엇이 이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는가?
공중파 몰락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신뢰의 상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뉴스의 논조가 180도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방송의 공정성에 환멸을 느꼈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악인이 되고,
비난받던 정책이 하루아침에 찬양받는 기이한 광경이 반복되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스마트폰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가 보도하면 믿을 것"이라는 80년대식 오만함을 버리지 못한 태도였다.
시청자들은 이제 생중계 중에도 실시간으로 팩트 체크를 하고,
SNS를 통해 편집되지 않은 원본을 찾아본다.
악마의 편집으로 인터뷰 내용을 왜곡하고,
맥락을 제거하여 의미를 바꾸는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이미 방송사보다 똑똑해졌다.
공중파는 시청자를 즐겁게 해야 할 의무를 망각하고,
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겼다.
예능 프로그램조차 정치적 올바름과 사회적 메시지를
주입하려 들면서 풍자와 해학이 사라졌다.
웃고 싶어서 켠 TV에서 교훈을 듣게 된 시청자들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시청률이 폭락하자 그 원인을
"시청자 수준이 낮아서 우리의 고품격 프로그램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돌린 오만함이었다.
고객이 떠나가는데 "고객의 안목이 부족하다"고 탓하는 장사치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태도는 시청자들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지표는 참혹하다.
10년 전 2조 원대였던 광고 수익은 7,500억 원으로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기업들은 이제 공중파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선택한다.
TV는 넷플릭스를 보기 위한 모니터로 전락했고,
젊은 세대에게 공중파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다.
2014년,
공중파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유튜브의 성장을 견제한답시고 자사 콘텐츠 클립을 모두 삭제하고
"우리 홈페이지 와서 돈 내고 봐라"는 갑질을 시도했다.
케이블 TV에게는 저작권료를 내라고 윽박질렀고,
지금은 네이버 등 AI기업에게도 저작권 위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
과연 이들은 국민을 위한 공영방송이 맞는가?
2024년 지상파 방송 3사의 예산은 7조 3,000억원이다.
결과는?
시청자들은 그냥 안 봤다.
넷플릭스의 진출도 무시했지만,
막대한 자본과 창작의 자유를 무기로 한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같은 글로벌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나영석 PD를 비롯한 스타 크리에이터들은 규제 많고
예산 깎이는 방송국을 떠나 자유로운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상황이면 뼈를 깎는 경영쇄신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시장의 순리이지만
그들은 손쉬운 국민 세금에 의존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권에 아부하는 길을 택했다.
2025년 11월,
방송법 개정으로 TV 수신료가 다시 전기요금 고지서에 결합되어 고지되기 시작했다.
월 2,500원,
KBS는 이를 "재난재해 방송, 장애인 방송 등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공적 재원"이라 포장한다.
그러나 이는 2003년, 'KBS 시청거부 운동본부'는
"시청료 안 낸다고 전기 끊는 건 막가파식 행정 편의주의"라며 거리로 나섰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민주당의 태도 변화다.
야당 시절 KBS의 편향 보도에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민주당이,
집권 후 어렵게 분리 징수하기로 했던 시청료를 다시 통합 고지하도록 법을 바꿔줬다.
정권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이 모습은,
앞서 지적한 공중파의 신뢰 상실 문제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근본적 문제는 강제성이다.
KBS를 본 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국민들이 왜 시청료를 내야 하는가?
OTT 시대에 인터넷으로 방송을 시청하는데,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같은 인터넷 사업자를 통한
선택적 유료 징수 방식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답은 명백하다.
시장 논리로는 살아남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신료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면,
셋톱박스에 KBS 채널을 유료로 등록하고 떳떳하게 시청료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선택권을 주는 순간,
국민들이 KBS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전기요금처럼 피할 수 없는 항목에 슬그머니 끼워 넣어,
반강제로 징수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공적 책무를 다한다는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신뢰를 잃고 시청자에게 외면받는 방송사가 강제 징수로 연명하는 것은 특권의 남용이다.
개선 노력 없이 법으로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태도야말로,
공중파 몰락의 본질을 보여준다.
공중파 방송의 몰락은 한 가지 교훈을 준다.
아무리 강한 위치에 있어도 고객을 무시하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신뢰를 잃고, 오만해지고, 변화를 거부한 대가는 가혹했다.
현직 방송인들조차 후배들에게 "이 업계에 오지 말라"고 조언하는 지금,
공중파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변화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