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없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일상 속으로

by 제임스

2018년 스웨덴의 한 은행에 강도가 들었다.

그러나 강도는 한 푼도 훔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은행 금고에 현금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나라 스웨덴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현금이 사라지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스웨덴은 전체 거래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에 불과하며,

2030년까지 완전한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러나 편리함의 끝에서 스웨덴은 예상치 못한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했다.

디지털 시스템의 취약성, 취약계층의 금융 소외,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의 통제 가능성이라는 심각한 문제들이 속출했고,

결국 스웨덴 정부는 2023년 국민들에게 현금을 비축하라고 권고하며

정책을 180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디지털 유토피아'의 이상을 무너뜨린 것일까?



편리함이 만든 배제의 사회


스웨덴의 현금 없는 사회 전환은 1990년대 후반

은행 강도 예방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민간 은행들이 공동 개발한 모바일 결제 앱 스위시

휴대전화 번호와 은행 계좌만 있으면 수수료 없이

송금할 수 있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교회 헌금, 길거리 버스킹 후원금까지 스위시로 결제할 정도로

현금은 일상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약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은 현금 거부를 법적으로 허용받았고,

2007년부터는 버스와 지하철에서조차 현금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소득층과 미성년자는 신용 부족으로 카드를 만들 수 없고,

스마트폰 구입조차 어려웠다.

고령층은 디지털 결제에 익숙하지 않아 상점에서 거부당하고,

농촌 지역 주민들은 가장 가까운 ATM까지 60km 이상을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편리함을 추구한 사회가 역설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경제 활동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앱 결제’ 경험 10명 중 3명뿐



시스템이 멈추면 멈추는 사회


더 심각한 문제는 디지털 시스템의 취약성이었다.

2021년 통신 장애 사태는 스웨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네트워크가 마비되자 모든 결제 시스템이 작동을 멈췄고,

통장에 돈이 있어도 물건 하나 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규모 정전이나 사이버 공격이 발생하면

국가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는 현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사이버 공격으로 우크라이나의 금융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것을

목격한 스웨덴은 디지털 시스템만으로는 국가 안보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쟁이나 재난 상황에서 현금이야말로 최후의 안전망임을 뒤늦게 인식한 것이다.

이에 스웨덴 정부는 상업은행의 입출금 서비스를

의무화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2023년 국민들에게 비상시를 대비해 현금을 비축하라고 권고했다.



독재의 도구가 될 수 있는 디지털 화폐


현금 없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의 통제 가능성이다.

중국은 이미 디지털 통제를 통해 어떤 일이 가능한지 보여주고 있다.

2014년부터 시행된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은

개인과 기업의 행동을 평가해 점수를 부여하고,

점수가 낮으면 항공기와 고속철 이용을 불허하며,

심지어 자녀의 교육 기회까지 제한한다.

경적을 울릴 때마다 감점이 쌓이고, 감점이 많은 운전자는 대출, 고용, 해외여행,

자녀의 상급학교 지원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는 단순한 신용 평가가 아니라 국민 통제 시스템이다.

개인의 온오프라인 행위를 40가지 세부영역으로 평가하여 선별적인 혜택

또는 차등적인 제재 조치를 취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부 노력 칭찬은 가산점이지만,

정부 비판은 감점 요인이 된다.

알리바바 같은 기업이 사용자 정보를 정부에 제공하면서,

중국 정부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현금이 없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통제가 더욱 강력해진다.

현금은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모든 거래가 디지털화되면 정부는 국민의 소비 패턴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도입되면 정부는 화폐에 유효기간을 설정하거나

특정 품목 구매를 제한하는 등 국민의 재산권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시행할 때도 문제가 된다.

현금이 있다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보관할 수 있지만,

현금이 없는 사회에서는 앉아서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독재정권의 디지털 억압 사례들


이는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역사는 독재정권이 등장하면 디지털 통제를 통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7년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이 제정한 혐오법은 '증오 조장'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근거로 최대 20년 징역형을 허용하고,

언론사 폐쇄, 인터넷 포털 차단까지 가능하게 했다.

야당 후보들의 출마를 금지시키고, 투표권 등록을 방해하며,

가격 통제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국민을 완전히 통제하려 했다.


미얀마의 사례는 더욱 극단적이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 군부는 모바일 인터넷 통신망을 차단했다.

페이스북, 왓츠앱, 인스타그램 등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한 접근을

신속히 차단하여 반군부 저항 세력의 정보 생산 및 공유 능력을 억제했다.

모든 이동통신사와 인터넷제공업체에 모니터링을 위한

스파이웨어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여,

전화 사용내역, 문자메시지 확인,

이메일을 포함한 모든 인터넷 트래픽 감시, 사용자 위치 추적을 했다.


미얀마 모바일 인터넷 차단·계엄지역 추가


캐나다에서도 우려스러운 사례가 있었다.

2022년 트럭 운전사 시위 당시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참가자들의 은행 계좌가 동결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디지털 금융 시스템이 정치적 통제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현금 없는 사회가 독재정권에게는

완벽한 통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반대파의 경제 활동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고,

국민의 모든 거래를 감시할 수 있으며, 정보 접근을 통제할 수 있다.

현금이라는 탈출구가 사라지면,

국민은 정부의 디지털 통제망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진다.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한국의 비현금 결제 비율은 89.1%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서울에서는 109개 버스 노선이 현금을 받지 않으며,

키오스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편의점 CU의 현금 결제 비중은 2016년 43.3%에서 2023년 14.3%로 급감했다.

한국은 스웨덴이 겪었던 길을 더 빠른 속도로 따라가고 있다.


한국은행은 스웨덴의 문제들이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빈곤 지역 1km 이내에 무료 ATM 설치를 의무화했고,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현금 결제 거부를 법으로 금지했다.

스웨덴 역시 예금 규모 700억 크로나 이상인 은행에

현금 입출금 서비스를 의무화하며 정책을 수정했다.



편리함과 자유 사이의 선택


스웨덴의 경험은 기술 발전과 효율성만을 추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보여준다.

현금 없는 사회는 분명 편리하고 투명하다.

화폐 제작 비용을 절감하고, 범죄를 줄이며, 지하경제를 양성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시스템 장애에 취약하며,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


특히 독재정권이 등장하면 디지털 화폐는 가장 강력한 통제 도구가 된다.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 베네수엘라의 언론 통제와 경제 배급제,

미얀마의 전면적인 인터넷 차단과 통신 감시는

디지털 시스템이 어떻게 국민 통제의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현금이 없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반대파의 계좌를

동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생존권을 박탈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편리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선택의 자유를 지킬 것인가?

스웨덴이 깨달은 것처럼 현금은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개인을 지키는 마지막 안전망이자,

국가 권력의 과도한 통제로부터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다.

비상금으로 현금을 보유하고, 의식적으로 현금을 사용하며,

취약계층의 현금 접근성을 보장하는 정책을 요구해야 한다.


편리함은 빌려 쓸 수 있지만, 자유는 한 번 잃으면 되찾기 어렵다.

스웨덴, 중국, 베네수엘라, 미얀마의 뼈아픈 교훈을 거울삼아

우리는 기술과 인간, 효율과 포용, 편리함과 자유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별점 다섯 개의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