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피터 렐리(Sir Peter Lely, 1618-1680)가 그린 카타리나 왕비의 초상화를 보면,
화려한 의상과 왕관 너머로 한 여인의 고독이 느껴진다.
찰스 2세의 궁정 수석 화가였던 렐리는 카타리나가 영국에 도착한 직후
그녀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포르투갈 공주로서 정략결혼을 통해 영국 왕비가 된 그녀는,
새로운 나라와 남편에 대한 기대를 품고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렐리의 붓끝에서 탄생한 왕비의 표정에는
이미 그 기대가 무너진 듯한 그림자가 어린다.
디르크 스토프(1610-1685)가 그린 또 다른 초상화는 더욱 아이러니하다.
포르투갈 궁정 의상을 입은 카타리나의 모습은,
영국에서 조롱받았고 그녀는 곧 그 복장을 포기해야 했다.
이 그림은 한 여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빠르게 포기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무언의 증언이다.
낯선 땅에서 자신의 뿌리마저 부정당해야 했던 왕비의 처지가,
화려한 의상 속에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궁정에 도착한 카타리나를 기다린 것은
남편의 수많은 정부들과 사생아들이었다.
가장 굴욕적이었던 것은 남편의 애첩 바바라 팔머를
수석 시녀로 맞이해야 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왕비로서의 존엄은 짓밟혔지만,
그녀는 침묵으로 버텼다.
야콥 후이스만스(1633–1696)는 왕비의 전통적인 초상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왕실 소장품에 있는 두 점의 뛰어난 초상화도 제작하였다.
첫 번째 작품은 캐서린이 찰스 2세와 결혼한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영국 도착 당시 입었던 유행에 뒤떨어진 옷차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그녀를 세련되고 관능적인 여성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초상화는 긴 생머리에 오렌지 꽃을 꽂고 목동의 지팡이를 든
양치기 소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캐서린의 순수함과 다산성을 강조하며,
결혼 초기 왕을 위해 많은 자녀를 낳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담아 제작되었다.
후이스만스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초상화는 그녀를 학문의 수호성인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로 묘사하고 있다 .
카타리나는 여왕의 이름과 같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일이 성녀의 축일과 겹쳤기 때문에,
여왕은 분명히 성녀와 어떤 유대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그림은 고결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왕이 성녀의 독립성과 강인함을 본받고 싶어 했음을 드러낸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카타리나가 첫 아이를 임신했다가 유산한 후의 시간들이다.
거듭된 유산 끝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왕비는,
왕비의 책무에만 집중하며 찰스를 내조했다.
베네데토 나리(1633~1715)의 붓끝에서 탄생한 이 초상화는
카타리나 드 브리간사의 위엄을 한 폭의 드라마처럼 담아내고 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에르민 모피의 순백색은 왕실의 고결함을 증명하고,
손끝이 닿은 황금빛 보주는 세상을 품은 통치자의 권위를 나직이 속삭인다.
겹겹이 쌓인 웅장한 커튼은 화려한 궁정의 이면을 가리듯 무겁게 내려앉아 있지만,
그 앞에 선 왕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포르투갈에서 건너와 낯선 영국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던 그녀의 삶처럼,
그림 속 진주 목걸이는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빛을 발산한다.
화가는 단순히 권력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화려한 의복 속에 감춰진 한 여성의 인내와 기품을 정교한 명암의 대비로 살려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붉은색은 단순한 색채를 넘어,
시대를 풍미했던 한 왕비의 뜨겁고도 고요한 외침으로 다가온다.
존 라일리가 그린 초상화 속 카타리나는 모피로 장식된
정교한 어두운 가운을 입고 위엄 있게 앉아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
찰스는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와 이혼하라는 귀족들의 요구를 거부하며
카타리나의 왕비 지위를 지켜주었다.
그녀의 묵묵한 헌신이 마침내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라일리의 그림 속 왕비의 눈빛에는 오랜 고통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한 힘이 담겨 있다.
찰스가 사망한 후 카타리나는 포르투갈로 돌아가 대우받으며
만년을 보내다 67세에 눈을 감았다.
여러 화가들이 남긴 카타리나의 초상화들은 단순한 왕실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배신과 상실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았던
한 여인의 삶을 증언하는 침묵의 서사시다.
캔버스 위에 남겨진 그녀의 얼굴은,
역사가 기억하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과 인내를 대변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하차투리안 - 가면무도회 중 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