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그린 화가들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말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진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던 시절,

예술가들은 붓으로 저항했다.

캔버스 위에 은유를 숨기고, 색채 속에 분노를 담았다.

독재와 억압의 시대를 살아낸 화가들의 작품 속에는

입조심해야 했던 이들의 절규가 스며있다.


1.jpg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학살당하는 스페인 민중을 그린 작품이다.

총구 앞에 무릎 꿇은 한 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의 흰 셔츠는 어둠 속에서 유독 밝게 빛나며,

곧 그를 관통할 총알을 기다린다.


고야는 영웅적 죽음을 미화하지 않았다.

대신 공포에 질린 얼굴들, 이미 피투성이가 된 시신들,

그리고 얼굴 없는 처형자들을 그렸다.

총을 겨눈 병사들은 기계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폭력의 익명성, 권력의 무자비함을 고야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그려진 당시에는 공개될 수 없었다.

너무 솔직했고, 너무 잔혹했으며, 너무 진실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전쟁의 비극과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작품은 근대 전쟁 미술의 시초로 여겨지며,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그 참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고야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후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_게르니카.jpg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나치 독일 공군이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한 사건을 다룬다.

거대한 흑백 화면 가득 비명이 들린다.

찢겨진 몸, 울부짖는 말, 죽은 아이를 안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어머니.

피카소는 색을 배제했다. 흑백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흑백이기에 더 강렬했다.

모든 장식을 벗겨낸 공포, 그 적나라함 앞에서 관객은 눈을 돌릴 수 없다.

당시 프랑코 독재 정권은 이 그림을 증오했다.

피카소는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고, '게르니카'는 망명 중인 그의 유언이 되었다.


"프랑코가 죽고 스페인에 자유가 올 때까지 이 그림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림은 1981년에야 비로소 고국 땅을 밟았다.


3.jpg 이응노 미공개작, '군상(people)'.한지에 수묵담채,35x54cm, 1988


이응노의 '군상' 연작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담았다.

1980년대, 군부독재의 억압 속에서 오순욱은 말없는 군중을 그렸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다.

개인은 지워지고 집단만 남았다.

그들은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군중.

하지만 그 침묵은 결코 순응이 아니었다.

화면 가득 메운 인간들의 존재 자체가 압력이었고, 잠재된 힘이었다.


33.jpg 이응노 미공개작, '군상'. 한지에 수묵, 34.5x36cm, 1987


말할 수 없었던 시대의 민중은 이렇게 화폭에 등장했다.

직접적인 저항의 언어는 위험했지만, 군상의 무게감만큼은 누구도 지울 수 없었다.

독재는 말을 빼앗는다.

하지만 화가들은 침묵 속에서도 진실을 그렸다.

그들의 붓은 검열을 피해 은유로 흐르고, 상징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시대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침묵하지 않을 것인가?




https://youtu.be/F2A5XjWFw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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