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핀 몽환의 풍경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첫 번째 만남은 놀라움이었다.

파스텔 톤의 분홍빛과 보랏빛이 안개처럼 번지는 화면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유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투명하고 맑은 색채.

수채화의 가벼움과 유화의 깊이가 공존하는 모순적 아름다움.

이해반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내 시선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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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독특한 화법은 동양화 전공이라는 배경에서 비롯된다.

먹과 안료를 종이에 스미게 하는 동양화 기법을 서양 재료에 접목한 것이다.

기름을 많이 섞어 묽게 만든 물감을 얇게, 수십 번 겹쳐 올리는 방식.

그렇게 쌓인 투명한 층들은 빛을 머금고 영롱하게 빛난다.

전통적인 서양화 기법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동서양이 만나 탄생한 고유한 언어다.


하지만 이해반의 진가는 기법을 넘어선 곳에 있다.

몽환적으로 아름다운 그의 풍경화 속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진 신비로운 산세, 그것은 다름 아닌 DMZ다.

남과 북을 가르는 세계 유일의 분단 현장.

꽃밭 사이로 떠다니는 작은 도형들은 출입 금지와 지뢰 경고를 상징한다.

가장 평화로운 자연 속에 가장 살벌한 표지판을 품은 풍경.

이 아이러니가 그의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20260102_121543.jpg 완충지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2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작가에게 DMZ는 낯선 뉴스 속 장소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통일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사진을 찍을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는 금지된 구역이었다.

카메라 대신 눈에 풍경을 담아야 했던 작가는 기억에 의존해

그 장면들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은 사실적 기록이 아닌, 상상이 더해진 관념적 풍경화가 되었다.


최근 '배틀그라운드' 시리즈는 그의 세계관을 더욱 확장시킨다.

'전쟁터'라는 제목과 달리, 화면엔 꽃이 만개하는 듯한 화려함이 펼쳐진다.

평온한 완충 지대와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잠재된 폭력.

이 극명한 긴장감이 가로 8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으로 구현될 때,

관객은 몽환적 세계의 한가운데 선 듯한 압도적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20260102_121805.jpg 배틀그라운드 그룹 III: 우울한 토양의 환영, 2024, 캔버스에 유화, 아크릴 243 x 800 cm


작가는 말한다.

자신의 작품이 심리적 완충 지대가 되길 바란다고.

DMZ가 물리적 완충 지대라면,

그의 그림은 화해의 공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전쟁과 자연, 불안과 평온, 현실과 환상. 서로 상반된 가치들이

한 화면 안에 부드럽게 섞이는 공간.

그래서 그는 기하학적 도형을 배치하고,

경계의 공간을 아름다운 색채로 감싼다.

관객이 더 많은 이야기를 쌓아갈 여지를 주기 위해.


20260102_121959.jpg 금강산 (Mt. Geumgang), 2020


이해반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상에 이른다.

누군가는 몽환적 자연에 편안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이면의 의미를 발견하며 놀란다.

그 다양한 반응들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완충 지대의 풍경일 것이다.

아름다움과 긴장, 평화와 폭력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이해반 작가가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하는 세계다.


지금도 그는 작업실에서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투명하게 쌓인 물감층처럼, 그의 세계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그가 앞으로 보여줄 풍경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20260102_122302.jpg 암녹강에서, 2021



https://youtu.be/ZaSaDbGlM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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