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스페인 톨레도에 정착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우리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라 부르는 이 화가는 16세기 말
유럽 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목소리를 낸 예술가였다.
1541년 크레타에서 태어나 1614년 톨레도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동방 비잔틴 전통과 서방 르네상스 기법을 융합하며
오직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해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이들은
그 비현실적인 인체 비례에 당혹감을 느낀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보면,
지상의 장례식 장면 위로 천상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그곳의 인물들은 마치 촛불처럼 길게 늘어나 있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였다.
그는 육체를 영적 존재로 변형시키기 위해 인체를 길게 왜곡했다.
머리는 작고 몸통은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인물들은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듯하다.
이러한 비례의 파괴는 물질세계의 법칙을 초월하려는
신비주의적 열망의 시각적 표현이었다.
《톨레도 풍경》 앞에 서면 하늘과 대지가 소용돌이친다.
어두운 청록색과 회색이 뒤엉킨 하늘은 마치 폭풍 전야의 긴장감을 담고 있으며,
도시는 초현실적인 빛 속에서 떨고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그는 내면의 감정을 풍경에 투사했다.
그의 붓끝에서 톨레도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영혼의 풍경이 되었다.
《성 베드로의 눈물》에서 엘 그레코는 회개하는 사도의 영혼을 포착한다.
위로 치켜든 눈빛, 뒤틀린 손, 떨리는 입술-
모든 것이 극도의 감정적 긴장 상태를 드러낸다.
그는 마니에리스모의 기교를 넘어서 표현주의로 나아갔다.
차갑고 푸른 빛과 뜨거운 붉은빛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색채의 드라마는
20세기 표현주의를 400년 앞서 예고했다.
엘 그레코의 《성 마르티노와 거지》는 자비의 순간을 포착한 걸작이다.
말 위의 성인이 자신의 망토를 칼로 잘라 반쯤 벗은 거지에게 나눠주는 장면에서,
성인의 우아하게 늘어난 신체와 말의 역동적인 곡선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차가운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망토가 타오르듯 빛나며,
관대함이라는 덕목이 시각적 불꽃으로 타오른다.
엘 그레코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종교적 일화를
인간 연민의 영원한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엘 그레코가 동시대인들에게 충분히 이해받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너무 앞서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인상파와 표현주의 화가들이 그를 재발견하면서,
엘 그레코는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그가 왜곡한 형태와 불안한 색채, 영적 강렬함은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톨레도의 좁은 거리를 걸으며 엘 그레코는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그는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응시했을 것이다.
그의 캔버스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통하는 창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느끼는 전율은,
한 예술가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천상의 비전에
우리 자신이 잠시나마 닿는 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