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지난 12월경, 과거 함께 일했던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표님, 내년에는 같이 일하시죠."
1년 전이었다면 주저 없이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때는 내 경험과 노하우가 사회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고,
그것이 보람찬 노후를 사는 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전혀 일할 생각이 없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한 노년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일을 계속하라.
둘째, 모임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라.
셋째,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
언뜻 듣기에 그럴듯하다.
젊을 때의 성공 법칙을 노년에도 그대로 적용하면
활기찬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분명한 목표는 있다.
바로 노는 것, 즉 '잘 노는 것(Playing well)'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노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료해지고 쇠약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강박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각종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려 애쓴다.
하지만 젊을 때의 기준을 노년에 억지로 끼워 맞추면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지른다.
젊었을 때도 보다 더 많은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올 수도 있다.
회복력이 떨어진 노년의 몸은 젊은 시절처럼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열심히'라는 굴레 속에서 살았다.
성실함은 미덕이었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거울 속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칼에 서리가 내리는 나이가 되자,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근면'의 정의를 다시 쓰고 싶어졌다.
노년의 가장 큰 적은 무료함이 아니라,
익숙한 습관처럼 몸에 밴 '과부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년의 행복은 '생산성'에서 '안녕(Well-being)'으로 중심을 옮기는 데 있다.
많은 이들이 은퇴 후에도 직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끊임없이 모임에 나간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가면'이라면,
노년의 삶은 급격히 피로해진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노년의 쉼은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향했던 에너지를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에너지를 보존하는 과정이라고.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노화로 약해진 심신을
보호하는 필수적인 방어 기제인 셈이다.
노년의 놀이는 젊은 날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즐기는 행위다.
창밖 풍경을 한참 바라보는 것,
좋아하는 차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
목적 없이 동네 길을 산책하는 것,
음악을 들으며 옛 추억에 잠기는 것,
아내와 손잡고 맛난 것 먹으러 가는 것,
시 한 줄에 미소를 짓는 것.
이 작고 사소한 행위들이 노년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우는 진정한 보석이다.
젊음이 '채움'의 미학이라면, 노년은 '비움'의 미학이다.
꽉 찬 잔에는 더 이상 좋은 것을 담을 수 없듯,
마음의 과부하를 덜어내야 비로소 노년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
잘 논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무언가를 성취해 증명할 필요도 없다.
늙는다는 것은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 시기다.
이제는 속도를 줄이고 생의 템포를 늦춰야 한다.
인생의 사계절 중 겨울은 만물이 잠들며 다음을 준비하는 휴식의 계절이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뜨거웠던 여름과 풍요로웠던 가을을 지나온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노후 준비가 아니라, '그냥 편히 노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허락이다.
쉼표가 찍히지 않은 문장은 숨이 차서 끝까지 읽을 수 없듯이,
노년이라는 마침표를 찍기 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긴 쉼표를 기꺼이 즐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나의 목표는 잘 노는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생을 마감할 때 "참 잘 살았다"가 아니라 "참 잘 놀았다"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노년의 참된 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