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가면 뒤에서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프란시스코 고야의 '카프리초스' 연작 52번,

'옷이 날개다'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 냉소적 제목에 전율했다.

화려한 성직자의 옷을 입은 존재가 있지만, 그 얼굴은 추악하다.

고야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성스러운 옷이 그 안의 부패한 본성을 감춘다는 것을.

사람들은 옷을 보고 경외하지만, 고야의 붓은 옷 속의 위선을 드러낸다.


고야의 '카프리초스' 연작 52번, 옷이 날개다(성직자의 위선)


18세기 말 스페인에서 성직자들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도덕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고야가 궁정에서 목격한 것은 달랐다.

호화로운 의복을 걸친 성직자들이 민중의 헌금으로 사치를 누리고,

면죄부를 팔아 부를 축적하며, 왕과 귀족들과 결탁해 권력을 나눴다.

'카프리초스'의 다른 판화들에서도 이 위선은 반복된다.

성직자들은 기도하는 척하지만 탐욕을 품고,

청빈을 설교하지만 금은보화를 쌓아두며,

겸손을 가르치지만 오만하게 군림한다.


'옷이 날개다'라는 제목의 냉소는 여기에 있다.

옷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옷이 사람의 추함을 가리는 것이다.

벗겨낸다면 그 안에는 고야가 그린 저 추악한 얼굴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옷에 속는다.

화려한 제의, 금실로 수놓은 법의, 위엄 있는 관.

이것들이 권위를 만들고, 그 권위 뒤에서 위선이 번성한다.


파울 클레, 천사가 되고 싶은 사람, 1939


파울 클레의 '천사가 되고 싶은 사람'(1939)은

이 위선의 본질을 날카롭게 찌른다.

천사의 날개를 달았지만 여전히 인간인 존재.

불완전하고 추한 모습 그대로인데 천사의 옷만 걸친 형상.

클레는 알고 있었다.

옷을 입는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성직자의 법의를 입고, 판사의 법복을 걸치고,

정치인의 양복을 입어도,

그 안의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때로는 추악하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 옷에 속는다.

천사의 날개를 보고 천사라고 믿는다.


벡신스키(Zdzisław Beksiński), 무제, 1972


황량한 대지 위, 거울 달린 의자에 놓인 창백한 여인의 목.

큰 눈동자가 뿜어내는 기괴함은 '세 번 보면 죽는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낳을 만큼 불쾌하고도 강렬하다.


폴란드의 거장 즈지스와프 벡신스키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뒤,

이토록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황홀한 초현실주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정작 자신의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론자'들을 혐오하며,

그저 내면의 풍경을 평온하게 그려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레이스 장식 아래 감춰진 실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그의 붓터치는

H.R. 기거와 비견될 만큼 압도적이다.


작가의 말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아내의 죽음과 아들의 자살, 그리고 단돈 몇 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지인의 아들에게

열일곱 번이나 찔려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작품보다 더 참혹했다.

어쩌면 '보면 죽는다'는 괴담은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당했던

작가의 고통이 그림을 통해 전이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죽기에 그 예언은 틀린 말이 아닐 터,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은 우리 삶의 유한함을 서늘하게 비웃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가 목격한 '인간 실격'의 현장처럼,

위선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낸 자리에는 지독한 허무와 고독만이 고여 있다.

그것은 세련된 문명인이라는 환상 뒤에 숨겨진,

우리 안의 뒤틀린 본성이자 추악한 진실이다.

거울 속 비친 내 눈망울이 벡신스키의 그림처럼

텅 비어 보일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이라는 성스러운 이름 아래 우리가 얼마나

비겁한 악마의 형상을 감추고 있었는지를.



https://youtu.be/yOhXaOcf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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