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라파엘 그로미(Raphaël Gromy)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손에 쥐어진 붓이 아니라,
그가 조심스럽게 다루는 인형의 손이다.
작가는 인형을 매개로 그림을 그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형에게 붓을 쥐어주고,
인형의 팔을 움직여 캔버스 위에 물감을 묻힌다.
이 기묘한 창작 방식은 처음에는 일종의 퍼포먼스나 개념미술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더 복잡한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로미는 인형을 단순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인형을 선택하고, 인형에게 이름을 붙이며,
인형의 '성격'에 따라 색과 붓의 종류를 달리한다.
어떤 인형은 격렬하고 즉흥적인 붓질을 하고,
어떤 인형은 섬세하고 반복적인 선을 긋는다.
작가는 인형의 관절 각도, 붓을 쥐는 방식,
캔버스와의 거리를 세밀하게 조정하지만,
동시에 인형이 만들어내는 우연성을 존중한다.
그의 작업실에는 수십 개의 인형이 있고,
각각의 인형은 서로 다른 회화적 어휘를 구사한다.
이 작업 방식이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작가인가'라는 물음이다.
인형을 움직이는 것은 그로미지만, 캔버스 위의 흔적을 직접 남기는 것은 인형이다.
작가의 의도와 인형이 만들어내는 물리적 결과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그로미는 이 간극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에게 인형은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는 필터이자, 예측 불가능한 협업자다.
완성된 작품들을 보면 인형의 존재가 뚜렷이 느껴진다.
인간의 손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어색함,
기계적 반복과 유기적 우연이 공존하는 특유의 리듬이 있다.
어떤 선은 떨리고, 어떤 색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번지거나 덜 번진다.
그로미는 이런 '실수'들을 수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인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회화적 진실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로미의 작업은 창작 행위에서 통제와 우연,
주체와 매개,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인형은 그저 기발한 도구가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의 손을 벗어난 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묻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의 캔버스 위에서 인형의 손과 작가의 손은 구분할 수 없이 겹쳐지고,
그 경계에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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