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과 추상의 경계

Grace Hartigan

by 제임스

그레이스 하티건(Grace Hartigan, 1922–2008)

전후 미국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중심에 선 몇 안 되는 여성 화가 중 하나로,

잭슨 폴록, 프란츠 클라인, 빌렘 드 쿠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은 순수한 추상에 머물지 않았다.

거리의 풍경, 시장의 군중, 신화와 문학적 이미지를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며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하티건의 붓질은 격렬하고 육감적이다.

두텁게 쌓인 물감 층과 충돌하는 색채는 도시의 소음과 에너지를 그대로 담아낸다.

"내 예술의 주제는 유머의 정의와 같다-고요 속에서 회상된 감정적 고통"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하티건의 캔버스에는 삶의 혼돈을 통과해 도달한 아름다움이 응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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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침대에 누워 있는 마돈나 (Madonna in Red Bed, 1994)》

서구 회화의 가장 오래된 도상 중 하나인 마돈나를 하티건 특유의 방식으로 전복시킨 작품이다.

성스러운 성모의 이미지는 강렬한 붉은 색채 위에 눕혀지며,

경건함과 육체성이 동시에 충돌하는 긴장된 화면을 만들어낸다.

붉은 침대라는 배경은 전통적 마돈나 도상이 지닌 정결하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며,

여성의 몸을 신성과 세속의 경계 위에 놓는다.

하티건은 종교적 원형을 존경하면서도 그것에 복종하지 않는다.

두꺼운 임파스토와 대담한 붓질은 인물의 형태를 반쯤 녹여내며,

마돈나를 하나의 고정된 상징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되살려낸다.

회화는 반드시 "내용과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이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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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여왕들 (Ireland, 1958)》

켈트 신화와 민속 이미지를 대담한 붓질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하티건의 문학적 상상력이 정점에 이른 사례다.

거칠고 원초적인 색채 속에 여성적 신화 서사가 녹아들며,

단순한 추상을 넘어 이야기가 있는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현재 구겐하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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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 (Ophelia, 1996)》 셰익스피어 『햄릿』의 비운의 여인 오필리아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리넨에 유채로 그려진 만년의 역작으로,

하티건이 평생 천착해 온 문학과 회화의 대화가 집약되어 있다.

물에 잠기며 스러지는 오필리아의 이미지는 격렬한 붓질과 풍부한 색채 속에서

비극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죽음을 다루면서도 화면은 억압되지 않고 오히려 넘쳐흐르듯 생동한다.

강렬한 색채와 제스처적 인물 표현은 노년의 하티건이 여전히 주제를 정복하는 화가임을 증명한다.

문학적 원형을 빌려오되 결코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하티건 특유의 자유로움이 빛나는 작품이다.


하티건은 말년까지 볼티모어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붓을 놓지 않았다.

메릴랜드 인스티튜트 칼리지 오브 아트의 호프버거 회화 대학원 원장으로서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류 미술사가 한동안 그녀를 주변부에 두었지만, 오늘날 재평가는 뚜렷하다.

그녀의 캔버스는 추상의 엄격함과 삶의 지저분한 풍요로움,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이 하나의 화면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https://youtu.be/VL_SOtWUe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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