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내 곁엔 하루도 빠짐없이 음악이 흐른다.
좋아하는 가수는 많지만 존경하는 가수는 딱 한 명이다.
그 이름 나훈아!
요즘처럼 정치적 편향된 목소리를 내는 가수들이 난무하는 시대,
우리는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돈도 권력도 마다한 채 오직 노래 하나로 국민의 곁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한민국의 가황, 나훈아.
그의 삶을 돌아보면 어쩌면 그가 왜 '가황'이라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950년 부산에서 태어난 최홍기 소년은 큰 무역선을 타는
아버지 덕분에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 콩쿠르 대회에 참가하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던 소년은
판검사나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노래를 부르던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 열정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심형섭 작곡가의 음악학원에서 빛을 발했다.
"물건이 하나 있다"는 심형섭의 소개로 오아시스 레코드 대표 앞에서
'라노비아'를 부른 그는 단 30분 만에 네 곡을 녹음하며 데뷔의 문을 열었다.
최훈이라는 예명이 평범하다 생각해 나훈으로 지었다가 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훈아'라 불리게 된 것,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할 가수의 이름이 완성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는 가요계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했다.
"서로가 있었기에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시절 서로의 존재 덕분에 황금기를 보낼 수 있었다"는
그들의 고백은 진정한 경쟁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나훈아의 인생은 화려했지만 결코 순탄지만은 않았다.
1972년 서울 시민회관 공연 중 괴한에게 피습당해 얼굴을
72 바늘이나 꿰매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세 명의 여인과의 인연은 그의 삶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특히 영화배우 김지미와의 6년 동거를 마무리하며 재산 분할 요구 없이
맨몸으로 나온 일화는 가슴을 적신다.
"남자는 돈이 없어도 살지만 여자가 돈이 없으면 살기 힘들다"는
그의 말에서 돈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뿌리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노태우 정권 시절 훈장 수여 제의를 "훈장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며 거절했고,
14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 입문 제의가 왔을 때도
"높은 자리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별은 아무 데서나 빛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예술가의 고집이었다.
2008년 1월, 루머에 휩싸였을 때 그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늘 아침 날씨가 제 속마음처럼 시리고 차가웠습니다"로 시작한
그의 기자회견은 예상 밖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탁자 위로 올라가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아니 된 굴뚝에 연기가 날까? 하지만 한국은 굴뚝이 없는데도 연기를 피운다"고
말하며 참여한 기자들에게 펜을 똑바로 굴리라는 우회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힘들어하던 시기,
그는 대한민국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좀처럼 TV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그동안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는데
전 국민이 힘들어하는 시기에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출연료 한 푼 받지 않는 노개런티 공연으로 국민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한결같은 소신이 느껴진다.
편을 떠나 공정한 시각으로 말할 줄 아는 이 시대의 양심,
돈과 권력 앞에 흔들리지 않는 예술가의 자세.
나훈아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다.
그는 시대의 거울이었고, 국민의 벗이었으며,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가 지나온 길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했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노래와 국민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훈아, 그가 바로 우리 시대가 가진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