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표를 잘하는 사람은 대본이 없다

완벽한 발표 대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다

by 제임스

"발표, 정말 실력의 문제일까요?"


회사에서 발표를 앞두면 며칠 전부터 잠을 설칩니다.

새벽 3시, 침대에 누워서도 발표 시뮬레이션을 돌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제가 발표할 내용은..." PPT는 몇 번이고 수정합니다. 폰트 크기, 애니메이션 효과, 슬라이드 전환 시간까지. 대본은 통째로 외웁니다. A4 용지에 빼곡히 적힌 문장들을 형광펜으로 칠하며 암기합니다.


그런데도 발표장에 서면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손에는 땀이 나고, 목소리는 떨리며, 준비한 문장들이 뒤엉킵니다. 겨우겨우 발표를 마치고 나면 진이 빠집니다.


"저는 발표를 잘 못해요."


수년간 저를 따라다닌 이 문장. 그런데 최근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발표를 못하는 걸까요? 아니면 못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두 가지 발표, 극명한 차이


첫 번째: 외운 발표

"Jira의 Gantt Table 도입 제안 발표 부탁드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제안한 기능이었습니다. 팀에서 Jira를 5년 넘게 사용했고,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저였죠. 이슈 트래킹, 워크플로우 커스터마이징, JQL 쿼리 작성...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Jira Marketplace에서 Gantt Table 앱을 발견했을 때, 자신 있게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정식 발표를 준비하면서 A4 10장 분량의 대본을 작성했습니다. Gantt Table 앱의 기능, 장점, 타임라인 시각화 방법...


발표 당일, 준비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지만 계속 버벅였습니다. 분명 제가 제안한 건데, 왜 이렇게 어색할까요?


"실제로 프로젝트에 적용해보셨어요?"

"아... 아직 본격적으로는... 데모 버전만 테스트해봤습니다..."


"종속성 관리는 어떻게 되나요?"

"그건... 매뉴얼 확인해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30분 발표가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Jira는 5년간 마스터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써보지 않은 앱 하나 앞에서는 초보자가 되어버렸죠.


두 번째: 경험의 공유

일주일 후, 개발팀 동료가 찾아왔습니다.

"제임스, 우리가 유닛 테스트는 작성하고 있는데, E2E 테스트도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아직 준비한 건 없었습니다. (그저 커피를 들고 있을 뿐이었죠.)

"E2E 테스트요? 좋은 타이밍이네요! 제가 3년 전에 처음 도입했을 때 배운 게 많은데, 그 경험 공유해드릴게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했습니다. 테스트 피라미드, ROI 계산법, 도구 선택 기준, 시행착오와 교훈.

"처음엔 모든 User Journey를 E2E로 커버하려고 했어요. 열정이 넘쳤죠. 그런데 실행 시간이 30분이 넘어가면서 CI/CD 속도가 너무 느려졌어요. 그때 깨달은 게, Critical Path 위주로 선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더라고요..."



깨달음: 발표 실력이 아니라 이해의 깊이

두 발표의 차이는 명확했습니다.


Gantt Table 발표

- Jira는 5년간 사용했지만 Gantt Table 앱은 데모만 해봄.

- 실제 프로젝트 적용 경험 없음.

- 대본에 의존한 설명

- 실무 질문에 당황


자동화 멘토링

- 8년간 직접 시행착오를 겪어오면서 축적된 경험

-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음.

- 체화된 지식을 자연스럽게 공유

- 어떤 질문도 경험으로 답변 가능


저는 발표를 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다'와 '경험했다'의 차이를 깨달은 순간이었죠.


5년간 Jira를 마스터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앱 하나 앞에서 초보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데모 버전으로 몇 번 클릭해본 것과 실제 프로젝트에 3개월간 적용해본 것의 차이. 매뉴얼을 읽은 것과 팀원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정착시킨 것의 차이. 이 간극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아무리 잘 아는 도구라도, 직접 써보지 않은 기능은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마치 김치찌개는 매일 끓이는 사람이 파스타 레시피만 읽고 요리 강의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이론이 완벽해도 손맛은 나오지 않는 것이죠.



전문가의 발표가 다른 이유


스티브 잡스의 교훈

2007년 1월 9일, 맥월드.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발표를 기억하시나요?

"Today, we're introducing three revolutionary products. The first one is a widescreen iPod with touch controls. The second is a revolutionary mobile phone. And the third is an internet communications device."

"So, three things: a widescreen iPod with touch controls, a revolutionary mobile phone, and an internet communications device. An iPod, a phone, and an internet communicator. An iPod, a phone... are you getting it?"


그는 잠시 멈췄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These are not three separate devices. This is one device. And we are calling it iPhone."


그는 대본을 읽지 않았습니다. 제품을 '이해'하고 있었죠.

- 왜 물리적 키보드를 없앴는지: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보다 유연하기 때문입니다"

- 왜 멀티터치를 도입했는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는 손가락입니다"

- 왜 이것이 전화기가 아니라 컴퓨터인지: "이제 주머니에 인터넷을 넣고 다닐 수 있습니다"


수천 시간 고민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한 과정이 녹아있었기에 청중과 진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의 구별


진짜 전문가의 발표

- "제 경험상..." (구체적 사례)

- "한 번은 이런 실패를..." (실제 경험)

- "오, 그건 생각 못했네요!" (열린 태도)

-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음

- 틀려도 "제 경험과는 달랐네요" 라고 인정


표면적 지식의 발표

- "자료에 따르면..." (누구의 자료?)

- "일반적으로..." (정말 일반적?)

- "좋은 지적입니다" (회피성 답변)

- 예상 질문만 준비

-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진짜 해결책


내 전문 분야 찾기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 3년 이상 해온 일은?

- 자주 질문받는 분야는?

-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경험한 곳은?


저의 경우,

- [ O ] 자신 있는 주제: QA 자동화, 테스트 전략, Python/React 테스팅, 성능 테스팅 자동화, ...

- [ X ] 아직 부족한 주제: 보안 테스팅, 접근성(a11y) 테스팅, CI/CD 파이프라인 구축, ...


만약 제가 내일 "웹 접근성 테스팅 전략"에 대해 발표해야 한다면? 패닉에 빠질 것입니다. WCAG 2.1 가이드라인을 밤새 외우고, 스크린 리더 사용법을 급하게 익히겠죠. PPT는 50장이 넘어갈 것이고, 대본은 A4 20장이 될 것입니다.


반면 "Python pytest 실전 활용법"이라면? 노트북 하나만 들고 가도 충분합니다. fixture의 마법, parametrize의 위력, mock의 함정, 병렬 실행의 고통... 3년간 pytest와 싸우며 얻은 상처와 깨달음이 있으니까요.


실패를 자산으로


저의 '실패 박물관',

2019년: E2E 테스트 과신

- 모든 시나리오를 E2E로 작성

- 결과: 실행 시간 30분 → CI/CD 병목

- 교훈: 테스트 피라미드는 이유가 있다.


2020년: 완벽주의의 함정

- 모든 엣지케이스 자동화 시도

- 결과: 유지보수 지옥, ROI 마이너스

- 교훈: 80/20 법칙을 기억하자


2021년: 메트릭의 착각

- 코드 커버리지 90% 달성에 집착

- 결과: 의미 없는 테스트만 양산, 실제 버그는 놓침

- 교훈: 숫자보다 중요한 건 품질


이 실패들이 이제는 최고의 발표 소재가 됩니다. 청중은 성공 사례보다 실패 경험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니까요.


작게 시작하기

Level 1: 점심시간 경험 공유

"이거 알아? 내가 어제 버그 찾다가..."

Level 2: 팀 세미나

"이번에 도입한 도구 사용법 공유할게요"

Level 3: 사내 CoP(Community of Practice)

"QA 자동화 실패 사례와 교훈"

Level 4: 외부 밋업

"스타트업에서 엔터프라이즈까지, QA 자동화 여정"


각 단계를 거치며 자신감이 쌓입니다. 대본은 점점 짧아지고, 경험 이야기는 늘어납니다. 키워드와 경험만 있으면 충분해집니다.



당신도 이미 전문가입니다


일상 속 숨은 전문성

친구와 수다할 때를 떠올려보세요.


- 맛집 얘기: "거기는 평일 2시에 가야 웨이팅이 없어요. 트러플 파스타 시키는데, 꼭 면 추가해야 돼. 양이 적거든."

- 취미 얘기: "이 브랜드가 가성비 최고예요. 초보자용이라고 써있지만 중급자도 충분히 쓸 수 있고, AS도 좋아서..."

- 게임 얘기: "그 보스는 패턴이 3개인데, 두 번째 패턴에서 왼쪽으로 피하면..."


이때의 당신의 모습은?

- 눈이 반짝입니다.

- 목소리에 확신이 있습니다 .

-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 질문이 나오면 더 신납니다.


왜일까요? "진짜로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닙니다.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고, 깨닫고, 체화한 지식입니다.



새로운 시작


마인드셋의 전환

"저는 발표를 못해요"가 아니라, "X"

이 말 대신,

"저는 제가 잘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O"


진짜 성장의 방향

발표를 잘하고 싶다면, 발표 학원보다 전문성을 키우세요!


발표 학원에서 배우는 것

- 시선 처리 (Z자로 스캔)

- 제스처 활용 (가슴 높이 유지)

- 목소리 변조 (3단계 톤)

- 침묵 활용 (3초 룰)


진짜 필요한 것

- 그 분야에서 충분히 실패해볼 것

- 문제를 직접 해결해볼 것

- 작은 성공을 축적할 것

-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 것

- 경험을 체계화할 것


대본을 외우는 발표자는 틀릴까 봐 두렵습니다.

경험을 나누는 전문가는 틀려도 괜찮습니다.


"제 경험과 달랐네요. 흥미롭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진짜 좋은 발표의 시작입니다.


기술이 아닌 진정성으로,

완벽함이 아닌 진실함으로,

대본이 아닌 경험으로.


발표는 공연이 아닙니다. "대화"입니다.

청중을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경험을 나누세요.

완벽한 발표자가 되려 하지 마세요. 진짜 전문가가 되세요.



*제임스, 이제는 발표도 조금씩 즐기는 사람*


이 글을 쓰며 깨달았습니다. 이제 '발표 공포증'에 대해서도 30분은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실패와 성공, 깨달음의 경험이 쌓였으니까요. ㅎㅎ :)

keyword
작가의 이전글테스트 코드의 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