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조 5천억 유로가 목을 조르다

― 부채 117%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메커니즘

by 박상훈

3화. 3조 5천억 유로가 목을 조르다

― 부채 117%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메커니즘


3화. 3조 4천억 유로가 목을 조르다.png


3조 5천억 유로.

프랑스 국가부채 규모다.

2025년 9월 말 기준 3.482조 유로로, GDP의 117.4%에 해당한다.


이 숫자가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날까?

1유로 지폐를 쌓으면 높이가 34만 킬로미터가 된다.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38만 4천 킬로미터)의 거의 90%다.


매년 이자만 670억 유로씩 내야 한다.
2026년에는 이것이 740억 유로로 증가할 전망이다.
하루로 환산하면 약 2억 유로다.


2025년 예산 기준으로

이는 프랑스 교육부 예산(643억 유로, 연금 제외)보다 많고,
국방부 예산(505억 유로, 연금 제외)보다도 훨씬 많다.


새로운 학교를 짓거나 병원을 확충하는 돈이 아니라,
과거에 쓴 돈의 이자로 나가는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새로운 정책을 만들 때마다 돈이 있나부터 확인해야 한다.


부채가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브뤼셀의 족쇄


유럽연합 재정준칙은 명확하다.
재정적자는 GDP 대비 3% 이내,

국가부채는 GDP 대비 60% 이내를 유지해야 한다.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에서 만든 이 규칙은 유로존 안정성의 핵심이다.


프랑스 현황은 어떨까?
2025년 재정적자는 5.4%로 기준의 1.8배다.
국가부채는 117.4%로 기준의 거의 2배다. 완전히 기준을 벗어났다.


EU 집행위원회는 2024년 7월 26일 프랑스에

과도한 재정적자 절차(EDP)를 개시했고,
2026년 1월 현재도 계속 감시 중이다.


이는 EU가 회원국의 재정정책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 프랑스는 예산을 짤 때마다 브뤼셀의 눈치를 봐야 한다.
미셸 바르니에 정부의 440억 유로 긴축안도

사실은 EU 집행위의 권고를 따른 것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예산권이 외부 기구에 종속된 셈이다.
프랑스 국민은 투표로 정부를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브뤼셀 관료들이 정책을 결정한다.


이자 지급이 미래를 삼키다


프랑스 정부 예산에서
이자 지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늘고 있다.


2019년에는 450억 유로로 예산의 6.2%였다.
2021년에는 520억 유로로 7.1%였다.
2024년에는 590억 유로로 약 8.5%가 됐다.
2025년 이자 지급은 670억 유로로 약 9.5%에 도달했다.
2026년에는 740억 유로로 10%를 넘어설 전망이다.


예산의 10% 이상이 과거 빚의 이자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는 교육부 예산(643억 유로, 연금 제외)보다 크고,
국방부 예산(505억 유로, 연금 제외)보다도 훨씬 크다.


2025년 예산을 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이자 지급 670억 유로는 전체 인프라 투자 예산보다 많다.
도로, 철도, 공항, 학교, 병원 건설에 쓸 돈보다
과거 빚의 이자가 더 많다는 뜻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는 줄어들고
과거의 부채만 늘어나는 악순환.

프랑스 회계법원은 2024년 보고서에서 경고했다.

“현재 추세가 지속되면
2029년 이자 지급이 1,070억 유로를 넘어설 것”

이라고.


금리 인상의 악몽


더 무서운 것은 금리 인상이다.
2020년까지 프랑스는 초저금리의 혜택을 봤다.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 덕분에
프랑스 10년 국채 금리는 0% 근처까지 내려갔다.

심지어 2019년에는 마이너스 금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돈을 빌려주면서 오히려 이자를 받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22년 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유럽중앙은행은 금리를 급격히 올렸고,
2025년 12월 기준 프랑스 10년 국채 금리는 3.5%에 이른다.
2020년 마이너스 금리에서 단 5년 만에 3.5%p 이상 올랐다.


금리 1%p 상승이 프랑스 재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프랑스 부채 3.5조 유로 중 매년 약 3,000억 유로가 차환된다.
만기가 돌아온 국채를 새로 발행해서 갚는 것이다.


금리가 1%p 오르면
새로 발행하는 국채의 이자 부담이 연간 30억 유로씩 늘어난다.

기존 부채까지 합치면
장기적으로 연간 350억 유로의 추가 부담이 발생한다.


이는 전체 보건복지부 예산의 20%에 해당한다.
유럽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프랑스 정부는 복지예산을 깎아야 한다.

통화정책이 복지정책을 좌우하는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졌다.


시장의 경고


국제 금융시장은 프랑스의 재정 위험을 감지했다.
2012년 프랑스는 AAA 신용등급을 받았다.
최고 등급이다.


하지만 2025년 10월 17일 S&P는 프랑스를

AA-에서 A+로 추가 강등했다.
2012년 이후 세 단계 하락한 것이다.

S&P는 "재정개혁 실패와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들었다.

프랑스-독일 국채 금리 스프레드를 보면 상황이 더욱 명확해진다.

2020년에는 30bp(0.3%p) 정도였다.

당시에는 시장이 프랑스와 독일을 거의 동등하게 평가했다는 뜻이다.

2025년 8-9월에는 85bp(0.85%p)까지 벌어졌다.
2026년 1월 현재는 67bp 수준이다.

시장이 프랑스를 독일보다 0.67-0.85%p 더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2012년 유로존 위기 이후 최대치 근처다.

프랑스가 1년에 발행하는 국채가 약 3,000억 유로다.
금리 스프레드 0.70%p는 연간 21억 유로의 추가 비용을 의미한다.
시장의 불신이 곧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


정치적 선택의 마비


부채 문제가 정치를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미셸 바르니에 정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르니에 총리는 완벽한 딜레마에 빠졌다.
- 지출을 늘리면 EU가 제재하고 시장이 불안해진다.
- 국채 금리가 올라가고 재정이 더욱 악화된다.
- 지출을 줄이면 국민이 반발하고 정부가 붕괴된다.

실제로 440억 유로 긴축안을 내놓자마자,

2024년 12월 4일 불신임으로 쓰러졌다.


야당들은 어떨까?
- 좌파는 "부자 증세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 멜랑숑의 누벨 프롱 뽀뿔레르는 최고 소득세율을 90%까지 올리고
대기업 법인세를 35%로 인상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 최고 소득세율 90%로는 연간 50억 유로밖에 거둘 수 없다.
- 재정적자 1,500억 유로를 메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우파는 "EU 룰을 무시하자"고 주장한다.
국민연합의 르펜은 "재정준칙은 독일이 프랑스를 통제하려는 수단"이라며
"프랑스는 주권국가로서 독자적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불가능하다.
EU 룰을 무시하면 유로존에서 퇴출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프랑스 경제는 붕괴한다.


결국 아무도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모두가 마법의 해결책만 찾으려 한다.

부채가 117%에 이르면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고통스러운 구조조정만이 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당할 정치가가 없다.


복지국가의 구조적 불균형


프랑스 부채 위기의 근본 원인은 복지국가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이다.


지출은 자동으로 증가한다.
인구 고령화로 연금 지출이 늘어난다.


프랑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2020년 20%에서 2050년 29%로 증가할 전망이다.
-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의료비도 늘어난다.
- 실업률이 높아지면 실업급여도 증가한다.


반면 수입 증가는 제한적이다.
- 고령화로 납세자가 감소한다.
- 생산가능인구(15-64세) 비율이 2020년 62%에서 2050년 55%로 줄어든다.

- 글로벌 경쟁 때문에 법인세율을 마음대로 올릴 수 없다.

OECD 평균 법인세율은 21%인데 프랑스만 35%로 올리면 기업들이 떠난다.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시대에 부유세를 대폭 인상하기도 어렵다.

수입보다 지출이 빠르게 늘어나는 구조적 불균형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회계법원 추산으로는
현재 추세가 지속되면 2030년 재정적자가 GDP의 7%에 이를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복지국가 시스템 자체를 손봐야 한다.
하지만 그럴 정치적 용기가 없으니, 계속 빚만 늘려온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떠넘긴 부담


3조 5천억 유로 부채의 진짜 피해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다.


현 세대가 받은 혜택은 막대하다.
관대한 복지제도, 35시간 근무제, 60세 조기 은퇴, 무상 의료와 교육.

1950-1980년대 태어난 프랑스인들은
경제 성장과 복지 확대의 혜택을 동시에 누렸다.


미래 세대가 부담할 비용은 무엇일까?

- 부채 원금 3조 5천억 유로를 갚아야 한다.
- 누적 이자는 수조 유로에 달할 것이다.
- 복지혜택은 축소될 것이다.
- 연금 수령 연령은 67세, 70세로 계속 올라갈 것이다.

- 세금 부담은 증가할 것이다.
- 현재 세대보다 더 많이 벌어도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티롤은 이를 세대 간 폰지 사기라고 불렀다.
현재 세대는 미래 세대 돈으로 복지를 받고 있다.


이를 세대 간 착취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민주주의의 질식


부채 117%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올가미다.
정치인들은 이제 유권자의 요구보다 채권자의 눈치를 본다.
새로운 복지정책을 공약하고 싶어도 "돈이 없다"는 현실에 막힌다.
국민이 선택한 정부보다 브뤼셀 관료들의 영향력이 더 크다.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 프랑스 국민은 투표로 정부를 선택했지만
- 실제로는 EU와 금융시장이 정책을 결정한다.


부채가 국민주권을 삼킨 것이다.
프랑스 정치학자 피에르 마넹은 이를 채무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유권자가 아니라 채권자가 정치를 지배하는 체제.


오늘의 교훈


3조 5천억 유로 부채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은 재정 건전성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채가 117%에 이르면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사라지고,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현재 세대의 복지를 위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은 세대 간 불의다.

프랑스가 증명하고 있다.

빚으로 유지하는 복지국가는 결국 무너진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국도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2020년 43.5%에서 2024년 51.3%로 불과 4년 만에 8%p 가까이 올랐다.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구조적 개혁에 나서야 한다.
복지 확대보다 복지 효율화가, 지출 증가보다 지출 합리화가 우선이다.


부채는 미래 세대에게서 빌린 돈이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이것이 세대 간 정의의 출발점이다.


다음 화 예고


4화에서는

'440억 긴축에 모두가 반대하는 이유 – 프랑스 집단 이기주의의 구조’를 다룹니다.


왜 모든 집단이 긴축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자신들만은 예외가 되려고 하는지,
그 이기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합니다.


프랑스 사회의 님비 민주주의가
어떻게 모든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 살펴봅니다.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프랑스가 선택한 잘못된 길

1부 3화. 3조 5천억 유로가 목을 조르다 – 부채 117%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메커니즘

(이 글은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 2025년 12월 부채 보고서, 프랑스 정부 부채관리청(AFT) 2025-2026년 차입 계획, EU 집행위원회 과도한 재정적자 절차 결정문(2024.7.26), 프랑스 회계법원(Cour des Comptes) 재정 위험 보고서(2024-2025), 프랑스 재정부 2025-2026년 예산안, 프랑스 교육부·국방부 2025년 예산 배정서, 유럽중앙은행(ECB) 통화정책 보고서(2025), S&P Global Ratings 프랑스 신용등급 강등 보고서(2025.10.17), Moody’s 프랑스 신용등급 평가(2024.12), FRED 프랑스 10년 국채 금리 데이터(2025.12), World Government Bonds 프랑스-독일 금리 스프레드(2026.1), 프랑스 국민의회 바르니에 내각 불신임 투표 기록(2024.12.4), 가브리엘 주크만 조세 정책 연구(2024), OECD 재정통계 및 인구 전망(2025), 장 티롤 『경제학의 선과 악』 세대 간 형평성 분석, 피에르 마넹 『민주주의의 원리들』(2012), Le Monde·Les Echos·RFI·Reuters 보도자료(2024-2026)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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