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440억 긴축에 모두가 반대하는 이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재정정책의 함정

by 박상훈

4화. 440억 긴축에 모두가 반대하는 이유

―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재정정책의 함정




2025년 9월 8일 저녁,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바이루 정부 불신임안 표결이 진행됐다.

결과는 364대 194.

극좌부터 극우까지 모든 야당이 손을 들어 정부를 무너뜨렸다.


바이루 총리를 쓰러뜨린 건 2026년 예산안이었다.

핵심은 440억 유로 긴축이었다.

GDP의 1.6%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다.


좌파는 "서민 때리기"라며 반대했다.

우파는 "이민비 삭감이 빠졌다"며 반대했다.

극우는 "EU부터 탈퇴하라"고 소리쳤다.

모두가 반대하면서도 각자 다른 이유를 댔다.


하지만 속내는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희생해야 한다.”

자신들만은 예외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좌파의 계산: 부자에게서 180억을 걷자


사회당과 불굴프랑스의 논리는 명확했다.


"440억 유로 긴축? 왜 서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나?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면 된다."

멜랑숑이 대표하는 누벨 프롱 뽀뿔레르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부유세(ISF)를 부활시켜 연 50억 유로를 거둔다.

법인세율을 25%에서 30%로 올려 연 80억 유로를 추가 징수한다.

금융거래세를 도입해 연 20억 유로를 얻는다.

초고소득자 소득세율을 인상해 연 30억 유로를 확보한다.


계산상으로는 180억 유로가 나온다.

440억 유로의 40%를 증세로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부유세는 2018년 폐지됐다.

폐지 이유가 뭐였을까?


프랑스 재정부 통계에 따르면

2000-2012년 사이 부유세 때문에 약 42,000명의 부유층이 해외로 이주했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1988-2007년 사이

ISF로 인한 자본 유출이 약 2,000억 유로에 달했다는 분석도 있다(Pichet, 2007).


부유세로 연간 50억 유로를 거뒀지만,

이들이 내던 다른 세금(소득세, 법인세, 소비세)까지 합치면

오히려 손해였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럼, 부유세를 다시 도입하면 어떻게 될까?


프랑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부유층의 해외 이탈이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처럼 가까운 국가로 이주하기 쉽다.

법인세 인상도 마찬가지다.


OECD 평균 법인세율이 21-23%인 상황에서

프랑스만 30%로 올리면 기업들이 떠난다.


이미 프랑스 기업들은

높은 세금과 경직된 노동시장 때문에 경쟁력이 약하다.


좌파의 대안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세수가 늘어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오히려 세수가 줄어들 수 있다.


우파의 주장: 이민비를 줄이자


공화당과 국민연합의 주장도 나름 논리가 있다.


"440억 유로 긴축? 이민자들 때문에 새나가는 돈부터 막아라."

르펜의 국민연합 대표 후보였던 바르델라는

이민으로 인한 비용이 연간 40억 유로에 달한다고 주장했다(2024).


프랑스 회계감사원(Cour des Comptes)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불법 이민만으로도 연간 18억 유로의 비용이 발생한다.


극우는 여기에 더해:

불법체류자 추방비용

난민 지원비용

이민자 사회보장비

통역·법무비용 등을 합쳐


수십억 유로를 절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난민 지원은 국제법상 의무다.

1951년 난민협약과 EU 공동난민정책에 따라

프랑스는 난민 신청자를 보호해야 한다.


이민자 사회보장비의 대부분은

이미 EU 시민권자나 합법 체류자에게 가는 돈이다.

이들은 세금도 내고 있다.


프랑스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합법 이민자들이 내는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도 상당하다.


그러니 불법체류자 추방도 말처럼 쉽지 않다.

프랑스 내무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약 22,000명의 불법체류자가 추방됐지만,

이는 추방 명령을 받은 인원의 일부에 불과하다.


출신국이 받아주지 않거나,

인도적 사유로 추방이 중단되거나,

실무적 어려움 때문이다.


그러니 우파의 대안도 실현하기 어렵다.

이민 비용을 대폭 줄이려면 국제법을 위반하거나 EU를 탈퇴해야 하는데,

그 대가는 훨씬 클 것이다.


극우의 환상: EU 탈퇴로 260억을 아끼자


르펜의 국민연합은 더 급진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440억 긴축 왜 해? EU 재정준칙만 무시하면 끝이다. 아예 EU를 탈퇴하자."

이른바 프렉시트(Frexit)다.

극우가 제시하는 프렉시트 효과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EU 분담금으로 연간 260억 유로를 절약한다.

공동농업정책에서 탈퇴해 농업보조금을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통화정책을 독립시켜 프랑 평가절하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한다.

무역정책 자율성으로 보호주의를 실시한다.


숫자상으로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EU 탈퇴 비용은 어떨까?

브렉시트 사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로 EU 탈퇴를 결정했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스탠퍼드대학교와 런던정치경제대학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2025년까지 브렉시트로 영국 GDP는 누적으로 6-8% 감소했다(NBER, 2025).

이는 연간 약 100억 파운드(약 130억 유로) 수준의 지속적 손실을 의미한다.

투자는 12-18% 감소했고, 고용은 3-4% 줄었다.


수출이 줄고, 외국인 투자가 급감했으며, 금융센터 기능이 약화됐다.

EU와의 새로운 무역협정을 맺는 데 5년이 걸렸고,

그나마 기존보다 불리한 조건이다.


그럼, 프랑스가 EU를 탈퇴하면 어떻게 될까?

프랑스 수출의 약 55%가 EU 회원국으로 향한다(INSEE, 2023).

관세와 비관세 장벽이 생기면

수출 감소는 막대한 규모에 이를 것이다.


파리는 유럽 금융센터 중 하나인데,

EU 탈퇴하면 런던처럼 지위가 약화된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급감할 것이다.


더군다나 프랑스로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의 상당 부분이

EU 시장 접근을 목적으로 한다.

탈퇴로 260억 유로를 아껴도

경제적 손실이 그보다 훨씬 크다면 오히려 손해다.


그래서 극우의 대안은 가장 비현실적이다.


중도의 고민: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자


마크롱 정부의 440억 긴축안은 나름 균형을 잡으려 했다.


지출 삭감과 증세를 혼합하여

모든 계층이 조금씩 부담하자는 것이다.


지출 삭감 내역:

공무원 인력 감축으로 수십억 유로 절약

지방정부 보조금 삭감

국방비 효율화

연금 지급 조정

행정비 절약


증세 내역:

대기업에게 한시적 기여금 부과

고소득층 소득세 할증

항공세 인상

담배세 인상


이론적으로는 합리적이다.

모든 계층이 조금씩 부담하니까.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달랐다.

공무원 노조는 격렬히 반발했다.


"인력 감축? 공공서비스 질이 떨어진다. 병원, 학교, 경찰이 부족해진다."

지방정부 시장들도 반대했다.


"보조금 삭감? 지방 투자가 중단된다. 도로, 학교, 복지시설을 어떻게 운영하나?"

기업들도 불만이었다.


“기여금? 이미 세금이 높은데 더 걷으면 경쟁력이 약화된다.”

고소득층도 항의했다.


"소득세 할증? 이미 소득의 45%를 세금으로 내는데 더 내라고?
해외로 이탈한다."

모두가 "다른 사람이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무원은 "민간 기업이 세금 더 내라"고 한다.

기업가는 "공공부문이 효율화하라"고 한다.

중산층은 "부자들이 더 내라"고 한다.

부유층은 "복지 남용을 막아라"고 한다.


결국 균형잡힌 긴축은 모두에게 미움받는 긴축이 된다.


집단 이기주의의 승리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프랑스 사회가 집단 이기주의로 파편화되었기 때문이다.


각 집단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

국가 전체의 장기적 이익은 고려하지 않는다.


프랑스 정치학자들은 이를 "NIMBY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NIMBY는 "Not In My Back Yard"의 약자다.

내 뒷마당에서는 안된다는 생각.


개혁이 필요하다는 건 모두 안다.

하지만 자신들만은 예외가 되고 싶어 한다.


2024-2025년 프랑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재정 건전화가 필요하다"는 질문에 다수가 동의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긴축 방법에 대해서는 소수만 찬성한다.


“공무원 감축에 찬성하나?”
“복지 축소에 찬성하나?”
“증세에 찬성하나?”


모든 질문에 과반이 반대한다.

모순적이다.

건전화는 원하지만 그 방법은 모두 반대한다.


이것이 NIMBY 민주주의의 한계다.

장기적 이익보다 단기적 이익을 선택하게 만든다.

집단 이익이 국가 이익을 압도한다.


리더십의 부재


440억 긴축에 모두가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리더십의 부재다.

국민을 설득할 정치 지도자가 없다.


“왜 이 개혁이 필요한지”
“장기적으로 어떤 이익이 있는지”
“왜 우리 모두가 조금씩 희생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정치적 비용을 감당할 리더가 없다.


바이루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적으로는 훌륭한 개혁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국민을 설득하는 대신 의회에서 표를 세는 데 집중했다.


결과는 364대 194 참패였다.

프랑스가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국민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할 용기

기득권의 반발을 감당할 의지

장기적 비전을 제시할 능력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춰진 리더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프랑스에는 그런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교훈


440억 긴축 실패가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집단 이기주의가 국가 전체의 미래를 볼모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집단이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자신들만은 예외가 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는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에서 고통스러운 개혁을 추진하려면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과 국민적 합의가 동시에 필요하다.


리더십 없이는 방향을 제시할 수 없고,

합의 없이는 추진할 수 없다.

프랑스는 둘 다 없다.


한국도 연금개혁, 노동개혁 등 구조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프랑스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하지만 그 "조금씩 양보"를 누가 먼저 시작할 것인가?

이것이 리더십의 본질이다.


다음 화 예고


5화에서는

‘364대 194 압도적 심판의 의미 – 좌우를 가리지 않는 반정부 연대의 위험한 신호’를 다룹니다.


극좌, 극우, 우파 일부가 손잡고 정부를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의 의미와,

'거부권 연합’만 가능하고 '건설적 연합’은 불가능한 프랑스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봅니다.

포퓰리즘의 수렴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분석합니다.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프랑스가 선택한 잘못된 길

1부 4화. 440억 긴축에 모두가 반대하는 이유 – 프랑스 집단 이기주의의 구조

(이 글은 CNN 바이루 정부 불신임 보도(2025.9.8), 프랑스 국민의회 심사 기록(2025.9), Reuters 2025년 예산안 보도(2024.10), 프랑스 재정부 부유세 영향 평가 보고서(2018), Acton Institute 부유세 연구(2019), Pichet 부유세 자본유출 연구(2007), 가브리엘 주크만 조세 정책 연구(2024), 프랑스 회계감사원(Cour des Comptes) 불법이민 비용 보고서(2023), 프랑스 내무부 이민 통계(2024-2025), Reuters 바르델라 이민정책 인터뷰(2024.6), Stanford University·London School of Economics 브렉시트 경제 영향 공동연구(NBER Working Paper, 2025), Bloomberg 브렉시트 비용 분석(2023), INSEE 프랑스 무역 통계(2023), PWC 프랑스 법인세 자료(2022-), OECD 법인세율 데이터베이스(2024-2025),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 재정정책 여론조사(2024-2025)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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