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364 대 194, 압도적 심판의 의미

좌우를 가리지 않는 반정부 연대의 위험한 신호

by 박상훈

5화. 364 대 194, 압도적 심판의 의미

― 좌우를 가리지 않는 반정부 연대의 위험한 신호



2025년 9월 8일 저녁(약 4개월 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역사적인 투표가 진행됐다.


바이루 정부 불신임안.
결과는 364 대 194.
찬성 65.2%, 반대 34.8%.
압도적 차이였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구성이다.


극좌 장뤽 멜랑숑의 누벨 프롱 뽀뿔레르(신민중전선) 180석,
극우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 142석,
우파 공화당 일부 42석.

평소에는 물과 기름처럼 대립하는 이들이 하나가 됐다.

이민 정책에서는 포용과 배척으로 극명하게 갈리고,
경제 정책에서는 국유화와 보호주의로 다르며,
EU에 대해서는 개혁과 탈퇴로 정반대다.

사회 이슈에서도 진보와 전통으로 충돌한다.

그런데 바이루 정부 앞에서는 하나가 됐다.


왜일까?


둘 다 "기존 시스템 파괴"를 원하기 때문이다.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은 순간,

프랑스 정치의 위기가 시작됐다.


포퓰리즘의 공통 코드


멜랑숑과 르펜은 정치적 스펙트럼 양 극단에 있다.
하지만 놀랍도록 비슷한 점이 많다.


첫째, 엘리트 혐오다.
좌파는 "부르주아 엘리트가 서민을 착취한다"고 말한다.
극우는 "글로벌 엘리트가 국민을 배신한다"고 주장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엘리트가 문제다.” 라는 메시지는 같다.


둘째, 외부 세력 비난이다.
좌파는 "미국 자본과 다국적 기업이 문제"라고 한다.
극우는 "EU 관료와 이민자가 문제"라고 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탓하는 구조다.


셋째, 단순한 해법을 제시한다.
좌파는 "부자 세금만 올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말한다.
극우는 "EU 탈퇴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한다.


넷째, 현실적 개혁을 거부한다.
좌파는 "복지 축소는 절대 불가"라고 한다.
극우는 "이민 통제 없는 개혁은 무의미"라고 주장한다.


결국 둘 다 포퓰리즘이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고 쉬운 해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해답은 실현 불가능하다.


프랑스 정치학자 장피에르 르고프(Jean-Pierre Le Goff)는

이를 극단의 수렴이라고 불렀다.


좌우 극단이 점점 비슷해지는 현상.
이념은 다르지만 정치 스타일은 똑같다.


분노를 자극하고,
적을 만들고,
단순한 해법을 제시한다.


중도의 완전한 고립


364-194 투표 결과가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중도 세력의 완전한 고립이다.

마크롱의 앙상블 연합이 확보한 표는 194표뿐이다.

전체 577석 중 33.6%에 불과하다.
이는 2024년 7월 총선에서 앙상블 연합이 확보한

159석(내무부 집계) 또는 168석(르몽드 분석)을 넘어서는 수치로,

일부 무소속 의원들의 지지까지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마크롱이 당선될 때를 기억하는가?
극단 세력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던 중도가
이제 완전히 소수가 됐다.


마크롱 지지율 변화를 보면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2017년 대선에서는 1차 24.01%, 2차 66.10%를 얻었다.
2차 투표에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가 모두 마크롱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극우를 막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2022년 대선에서는 1차 27.85%, 2차 58.55%였다.
여전히 승리했지만 2차 투표 지지율이 약 7.5%p 떨어졌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14.6%로 급락했다.

2024년 국민의회 총선에서는 연합 기준으로 약 25-26%의 득표율을 얻었지만
과반에는 한참 못 미쳤다.


프랑스 정치가
중도 vs 극단 구조에서
극좌+극우 vs 중도 구조로 바뀐 것이다.


중도가 다수를 대표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중도는,
극좌와 극우 사이에 끼인 소수가 됐다.


합의 불가능한 정치


364-194 투표의 진짜 문제는
앞으로 어떤 정부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가능한 시나리오를 분석해보자.


시나리오 1: 좌파 정부
누벨 프롱 뽀뿔레르가 총리를 지명한다면?
극우 국민연합 142석, 중도 앙상블 약 160-170석, 우파 공화당 약 40-60석이 반대한다.
총 340석 이상이다.
과반인 289석을 훨씬 넘는다.
즉시 불신임이 가능하다.


시나리오 2: 우파 정부
공화당이 총리를 지명한다면?
극좌 누벨 프롱 뽀뿔레르 180석과 중도 앙상블 약 160-170석이 반대한다.
총 340석 이상이다.
역시 과반을 넘는다.
불신임 가능하다.


시나리오 3: 극우 정부
국민연합이 총리를 지명한다면?
모든 세력이 반대한다.
극좌 180석, 중도 약 160-170석, 우파 약 40-60석.

총 380석 이상이다.
확실한 불신임이다.


시나리오 4: 중도 정부(현재)
극좌 180석과 극우 142석이 반대한다.
총 322석이다.
역시 과반을 넘는다.
불신임 가능하다.

어떤 조합도 안정 다수를 확보할 수 없다.
"거부권 연합"은 가능하지만
"건설적 연합"은 불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바이마르의 그림자


이런 상황이 역사적으로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19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인 1930-1933년을 보자.

중도 정당들의 지지율이 급락했다.
극좌 공산당과 극우 나치당이 부상했다.
연정 구성이 불가능해졌다.

정부 수명은 평균 8개월이었다.


현재 프랑스는 어떤가?

2022년 이후 상황을 보자.
중도 마크롱 연합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극좌 멜랑숑과 극우 르펜이 부상하고 있다.

연정 구성이 어렵다.
정부 수명은 평균 9개월 내외다.
패턴이 너무 비슷하다.


물론, 프랑스가 바이마르처럼
민주주의 붕괴를 맞이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프랑스에는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과 제도가 있다.

하지만 통치 불가능성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의회에서 막힌다.
예산안도 통과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개혁은 시작도 못 한다.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이를 느린 마비라고 불렀다.
갑자기 붕괴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기능을 잃어간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포퓰리스트들의 계산된 전략


극좌와 극우가 연합한 이유는 명확한 정치적 계산이다.
그들에게는 3단계 시나리오가 있다.


1단계: 중도 정부 무력화
모든 개혁안에 반대한다.
정부를 계속 교체시킨다.
"기존 정치는 실패"라는 인식을 확산시킨다.
바이루 정부 불신임이 바로 이 1단계다.


2단계: 혼란 상황 이용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 책임을 회피한다.
"우리는 권력이 없었으니 책임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만이 대안"이라고 선전한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을 더욱 확산시킨다.


3단계: 권력 장악
2027년 대선에서 극단 세력이 결선에 진출한다.
중도 후보는 3위로 탈락한다.
극좌 vs 극우 최종 대결이 펼쳐진다.
어느 쪽이 이기든 극단 세력이 집권한다.

이게 그들의 시나리오다.

364-194 투표는 그 시나리오의 첫 번째 단계다.

2025년 9월까지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거부주의의 승리


프랑스의 압도적 불신임 투표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기능 부전에 빠졌다는 신호다.

정상적인 민주주의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견제하며 협력한다.

정책별로 찬반이 달라진다.
합리적 토론과 타협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프랑스에서는 여당 vs 모든 야당 구조가 고착됐다.

모든 정책에 일괄 반대한다.
감정적 대립과 거부만 존재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거부주의”(rejectionism)다.
건설적 대안 제시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하는 정치.
이런 정치에서는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프랑스 정치학자 올리비에 뒤아멜(Olivier Duhamel)은
이를 부정의 정치라고 불렀다.

무엇을 하자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자는 정치다.
긍정적 비전이 없고 부정적 거부만 있다.


프랑스 예외주의의 종말


364-194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정치적 예외주의가 끝났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미국식 양당제도 아니고 독일식 연정도 아닌,
프랑스만의 독특한 정치를 자랑했다.


강력한 대통령제와 다양한 정당들이
조화를 이루는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미국보다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독일보다 연정 구성이 어렵다.

유럽에서 가장 "통치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프랑스 예외주의는 끝났다.
이제 프랑스도 다른 서구 민주주의처럼
포퓰리즘과 극화의 위기에 직면했다.
차이가 있다면 프랑스는 더 심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양당제라도 있다.
독일은 연정 전통이 있다.
프랑스는 둘 다 없다.

그래서 더욱 운영이 어렵다.


오늘의 교훈


364대 194의 압도적 심판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국민의 분노는 정치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크롱의 패배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기존 정치 엘리트에 대한 거부였다.


프랑스 국민은 "변화"를 원했지만
정치권은 "현상 유지"만 고집했다.

극단의 부상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의 결과다.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파괴적 대안이 득세하게 된다.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 다 기존 시스템 파괴를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도 점점 극화되고 있다.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치권의 근본적 각성이 필요하다.
국민이 원하는 건 파괴가 아니라 개혁이다.

거부가 아니라 대안이다.

분노가 아니라 희망이다.

정치권이 이를 제공하지 못하면
극단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다음 화 예고


6화에서는 '마크롱이 또 총리를 바꿔야 하는 이유
– 9개월 만에 사임한 총리와 체제 위기’를 다룹니다.


왜 프랑스에서는 총리가 평균 1년도 못 버티는지,
제5공화국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분석합니다.
강력한 대통령제와 약한 의회,
이 모순된 구조가 어떻게 정치 불안정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봅니다.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프랑스가 선택한 잘못된 길
1부 5화. 364대 194 압도적 심판의 의미 – 좌우를 가리지 않는 반정부 연대의 위험한 신호

(이 글은 프랑스 국민의회 회의록(2025.9.8), 2024년 유럽의회 선거 결과, 2024년 프랑스 국민의회 총선 결과(프랑스 내무부 공식 집계 및 르몽드 분석),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OpinionWay 정치 동향 분석(2024-2025), 장피에르 르고프(Jean-Pierre Le Goff) 등 프랑스 정치학자들의 분석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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