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불완전

존재의 잔열 III

by 윤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시는 비를 맞는 법을 알고 있었다.
유리 간판들이 젖은 불빛을 품고,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말없이 걸었다.
발자국 소리와 우산 끝의 물방울이
리듬처럼 이어졌다.
누군가의 발소리, 자전거의 체인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의 금속음.
모든 것이 조용했지만, 살아 있었다.
낯선 공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온도가 있었다.

아이는 열이 났다.
작은 몸이 품 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해열제를 다 써버린 뒤였다.
나는 휴대폰 번역기를 켜고
‘소아과’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지도의 작은 점 하나가 반짝였다.
그 불빛이 그날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거리에는 젖은 흙과 간장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자판기의 불빛이 흰 벽에 비치고,
누군가의 비옷 자락이 바람에 스쳤다.
그때마다 내 심장도 같이 흔들렸다.
비는 천천히 내렸고,
그 속에서 나는 아이를 꼭 안고 걸었다.
온 세상이 나를 모르는 언어로 흘러가고 있었다.

병원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희미한 조명이 새어나왔다.
문을 밀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짧고 맑은 소리였다.
공기는 따뜻했다.
간호사가 마스크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웃음 하나가
낯선 세상의 문법을 바꿔놓았다.

의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청진기를 꺼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들려왔지만,
그 말의 결은 부드러웠다.
나는 번역기에 대고 천천히 말했다.
“어제부터 열이 있어요.”
의사는 웃었다.
괜찮다고, 금방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의 억양이
그날 내가 들은 어떤 위로보다 따뜻했다.

약국으로 가는 길에
비가 잦아들었다.
젖은 거리는 불빛을 받아 반짝였고,
어딘가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간판의 불빛이 붉게 번지고,
작은 식당의 문틈 사이로
김이 하얗게 새어 나왔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리 내 웃지는 않았지만,
고요한 공기 속에서 웃음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 도시의 온도는 낮았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따뜻했다.

약국의 문을 열자 종소리가 났다.
직원이 작은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짧은 단어였지만,
그 뜻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괜찮아질 거예요.’
단어는 몰라도, 그 말의 온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리는 다시 고요했다.
비는 멈췄고,
바닥에는 반쯤 사라진 물웅덩이들이
가로등의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천천히 걸었다.
그 순간, 세상이 아주 조용하게 숨을 쉬었다.
그 고요 속에서
낯선 도시가 조금 익숙해졌다.

그날 밤, 아이는 잠들었다.
나는 불을 끄고 커튼을 열었다.
물방울이 맺힌 창문 너머로
흐릿한 불빛들이 반짝였다.
도시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나는 그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사람의 온도는 통한다.
이곳의 친절은 설명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그건 이해의 다른 형태였고,
그 따뜻함이 내 안에 잔열로 남았다.

몇 해가 지난 지금도
그날의 빗소리와 불빛이 가끔 떠오른다.
그건 단순한 여행의 조각이 아니다.
내가 느꼈던 불안과 안도,
낯선 도시의 공기가 내 안에서
아직도 미세하게 숨 쉬고 있다.
그건 사라진 체온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인간의 온기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언어로 가득한 세상을 걷는다.
하지만 그날의 경험 덕분에
낯섦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때의 온도는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가고 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온도로,
그날의 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