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불완전

존재의 잔열 IV

by 윤담

햇빛이 강했다.
모래는 눈부시게 빛났고,
그 빛 아래서 그림자조차 숨을 죽였다.
운동장은 조용했다.
공 하나, 글러브 두 개, 그리고 우리 둘뿐.

그는 말했다.
“이 시간에 여길 왜 오자고 한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음료수 캔을 흔들었다.
얼음이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가,
한낮의 고요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냥, 조용해서.”
그는 웃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좋았다.
말이 사라진 자리엔
빛과 땀, 그리고 오래된 공기의 냄새만 남았다.

우린 한때 같은 팀이었다.
해가 지도록 공을 던지고,
밤이면 경기 얘기로 잠을 설쳤다.
패배도, 눈물도,
그 시절엔 다 환희의 일부였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 사이에 얇은 막을 만든다.
투명하지만 견고한 막.
서로를 여전히 좋아하면서도
예전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
그 막을 알게 된 게,
아마 어른이 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가 공을 던졌다.
오랜만의 캐치볼이었다.
가죽의 마모된 감촉이 손끝을 때렸다.
“요즘은 그냥 버티는 게 일인 것 같아.”
그가 말했다.
“나도 그래.”
내가 대답했다.

공이 오가는 동안,
말보다 리듬이 대화를 대신했다.
햇빛이 점점 기울었고,
그림자는 길어졌다가 천천히 녹았다.

더그아웃 그늘에 앉자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여름빛 속으로 녹았다.
나는 말했다.
“그땐, 우리 둘 다 어렸어.”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가늘게 뜨며 먼 하늘을 봤다.
그 표정이 묘하게 예전의 그와 닮아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친구란 결국,
같은 시간을 통과한 또 다른 목격자라는 것을.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의 삶에 남은 열기를 기억하는 사람.

그가 일어섰다.
“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발자국이 흙 위에 찍혔다가,
햇빛에 녹듯 사라졌다.

남겨진 나는 공을 쥐었다.
손바닥의 열이 천천히 식었다.
묘하게 쓸쓸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어쩌면 우정이란,
뜨겁게 던지고, 조용히 식혀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식어가는 시간 속에 남는 게
진짜 온도니까.

운동장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던졌던 공의 궤적은
이제 공중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궤적의 온도만은
아직 내 안에서 미세하게 타오른다.

그것이 잔열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환희의 시절,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는 감정의 표면.
식어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