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이세계

투명한 도시 속 비석에 남겨진 글

by 윤담


다음 글은 이 투명한 도시의 오래된 골목 끝,
사람들의 시선에서 조금 비켜난 자리에서
시간에 닳아가며 서 있는 한 비석에
조용히 새겨져 있는 문장이다.

나는 오래 고민해왔다.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그 상처를 넘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 가지 사실만은
선명해졌다.

"나는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은 분노도, 복수의 의지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참았고,
너무 오래 침묵했고,
너무 오래 버티며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도착한 가장 조용한 결론이다.

사람들은 용서를 미덕처럼 말한다.
마치 용서하지 못하면
성숙하지 못한 인간인 것처럼,
부드러움도 지혜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아니라
‘지층’이 된다는 것을.

상처가 아픔만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감정의 형태를 바꾸고,
감정은 다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재편한다.

나를 다치게 한 일들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형태를 바꾸어버린 충격들이었다.

그걸 어떻게
“괜찮아, 이미 지나갔어”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용서를
낭만적인 행위로 포장하지만
실은 나를 상하게 한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 된다.
나는 그 면죄부를 쉽게 넘길 만큼
가볍게 살아온 적이 없다.

내가 버틴 날들,
내가 삼켜낸 울음들,
내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때마다
흔들린 마음의 가장자리를
아무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용서란 이름으로
그 모든 고통을 희석해야 하는가.

나는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은 아주 인간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느낀 상처는 실제였고,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실제였고,
내 가슴 안에서 부서졌던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내 세계를 파괴한 사람에게
그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을 배반하는 일이다.
나는 그 배반을 하고 싶지 않다.

상대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변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사과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사면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책임을 지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이유도 없다.

그것이 미움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영원히 미워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미움을 오래 들고 살고 싶지 않다.
그 무게는 내 삶을 잠식하고,
내 숨을 얕게 만들고,
내 감정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선언은
“나는 더 이상 그 상처의 일부로 살지 않겠다”는
아주 묵직한 선언이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 상처를 미화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나를 다치게 한 사람을
선량한 인간으로 재구성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저
상처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상처 위에서
다시 내 삶을 꾸리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나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이 나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나는 용서 없이도
다시 살아갈 수 있고
다시 웃을 수 있고
다시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용서하지 않는 건
성장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내 상처의 깊이를 정확히 아는 존재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용서는 때때로
상대를 살리고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나는 그 방식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상처의 기록을 지워버리는 대신
그 기록 위에
다시 내 삶을 적어나가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