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인간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작고 얇은 조각들이 소리를 내는 것을 듣는다. 발뒤꿈치가 보도블록의 미세한 모서리를 넘을 때, 몸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마음은 잠깐 뒤로 물러선다. 그 짧은 틈에서 어떤 기억이 빠져나오고, 어떤 후회가 접힌 채로 다시 들어간다. 어쩌면 나는 걷는 사람이라기보다, 걸으면서 나를 맞추는 사람에 가깝다. 몸은 한 방향으로 진행하지만, 내 안의 조각들은 자꾸 반대편을 향해 굴러가려 한다. 매일의 나를 구성하는 재료가 그렇게 제각각이라면, 한 번의 정답으로 “온전함”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도시는 투명하다. 투명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과 다르다. 빛이 통과한다는 뜻, 그리고 그 통과의 과정에서 무엇이든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유리벽 너머의 사무실,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 횡단보도 신호등의 초록이 비가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얇게 번지는 순간들. 도시의 표면은 늘 반사와 투과 사이에서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 사람의 내면도 닮아 있다. 나는 종종 나를 “불투명한 덩어리”로 느끼지만, 도시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반대다. 한 겹만 벗겨도 그 아래가 나오고, 그 아래를 또 벗기면 또 다른 층이 나온다. 투명함은 끝이 아니라, 끝을 가장한 깊이다.
시간은 첨탑에서 위에서 아래로 원운동을 하며 움직인다. 이 문장은 처음엔 이상한 꿈처럼 들리지만, 오래 들여다보면 서늘하게 정확하다. 우리는 시간을 직선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앞으로”, “뒤로”, “지나갔다”, “다가온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체감하는 시간은 늘 원형에 가깝다. 아침의 커피 향이 어제의 피로와 이어지고, 퇴근길의 바람이 오래전 겨울의 목을 다시 건드린다. 첨탑은 도시의 높은 지점, 가장 멀리서도 보이는 기준점이다. 그 꼭대기에서부터 시간이 내려온다고 생각하면,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궤도를 따라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에서 아래로, 원을 그리며 내려오는 시간. 매일은 비슷하지만 같지 않고,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듯하지만 조금씩 낮아진다. 나도 그렇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복은 늘 다른 층위에서 일어난다. 그게 성장인지, 침잠인지, 아직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퍼즐을 맞춘다. 퍼즐의 조각은 사건만이 아니다. 내가 했던 말, 하지 못했던 말, 누군가의 눈빛에서 도망친 순간, 용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방어였던 선택. 그리고 아주 사소한 조각들, 예를 들면 빨간불에 멈춘 동안 내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 영수증을 접어 구기는 습관 같은 것. 그런 조각들은 작고 볼품없어 보여서 버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퍼즐은 아름다운 조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세한 흠, 조금의 얼룩, 색이 바랜 모서리가 있어야 전체 그림이 생긴다. 문제는, 내가 어떤 조각을 “내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에 있다. 나는 종종 내게 불리한 조각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내게 유리한 조각은 내 실력으로 착각한다. 이 편파가 지속되는 한, 퍼즐은 맞춰지지 않는다. 혹은 맞춰진 것처럼 보일 뿐, 어느 날 작은 충격에 와르르 무너진다.
“이 퍼즐을 모두 맞춘다면 나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간절하지만 위험하다. 왜냐하면 “모두”라는 단어가 이미 함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퍼즐에는 완성 그림이 없다. 상자 뚜껑이 없고, 누가 정답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어떤 조각은 평생 손에 쥐고 있어도 맞는 자리를 찾지 못한다. 어떤 조각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러니까 한 바퀴쯤 돌아 내려온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자리를 드러낸다. 그러니 “모두 맞추면 온전해진다”는 믿음은, 온전함을 미래로 미루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불완전하니 보류, 완성된 뒤에야 살겠다는 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보류되지 않는다. 도시는 계속 투명하게 빛을 통과시키고, 첨탑의 시간은 원을 그리며 내려온다. 내가 멈춘다고 해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온전함이란 어쩌면 완성이 아니라 수용에 가깝다. 맞추지 못한 조각이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하는 상태,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는 용기,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이유로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태도. 나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모든 조각을 맞춰야 한다고 믿어 왔지만, 실제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맞춤”보다 “견딤”에 가까웠다. 어긋난 조각을 억지로 밀어 넣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인정한 채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래서 온전함은 딱 맞아떨어진 모서리에서가 아니라, 약간의 틈이 남아 숨이 드나드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틈을 관리하는 일이다. 한 발을 내딛는 동안 나는 나를 잃을 수도 있고, 동시에 조금 더 나를 찾을 수도 있다. 도시의 투명한 표면은 나를 비추지만, 나는 그 반사에 속지 않으려 한다. 첨탑에서 내려오는 원형의 시간은 나를 반복 속에 가두기도 하지만, 반복을 통해만 배울 수 있는 어떤 진실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니 퍼즐은 언젠가 “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다른 조각을 손에 쥐고 다른 방식으로 시도되는 것이다. 오늘은 실패해도 내일의 원운동이 다시 나를 데려온다. 조금 낮아진 자리에서, 조금 달라진 시선으로.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 보고 싶다. 퍼즐을 모두 맞추면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맞추는 과정에서 이미 온전해지고 있다고. 조각을 찾기 위해 걸어 나서는 순간, 모서리를 다치고도 다시 붙잡는 순간, 어떤 조각을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순간에. 온전함은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다. 도시가 투명한 채로 나를 통과시키는 동안, 나는 내 조각들을 하나씩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빛에 비춰보고, 때로는 내려놓고, 다시 주워 들며 걸어간다. 그리고 그 걷기의 리듬 속에서, 나는 이미 인간이 된다. 온전함은 도착지가 아니라, 발걸음이 남기는 얇은 결, 그 결이 쌓여 만들어내는 나만의 지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