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이세계

악몽

by 윤담

악몽은 소리 없이 시작된다.
도시는 이미 하나의 구조를 완성한 채 서 있다.
유리와 철, 빛과 도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정교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무너지지 않겠다는 표정.
그런데 그 정밀한 형상 한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오차가 생긴다.
나는 그 오차 위에 서 있다.
고층 빌딩의 가장자리.
발아래 겹겹이 쌓인 도로와 신호등,
붉은 브레이크등은 길게 이어지지만
직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굽고,
어딘가에서 속도를 늦추며,
다시 서로를 이어 붙인다.
도시는 앞으로만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미세한 조정을 반복한다.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차갑고 얇은 결이 피부 위를 맴돌고,
네온사인의 보랏빛이 눈동자에 번진다.
구두 밑창이 난간의 금속을 스치는 순간
마찰음은 곧장 사라지지 않는다.
공기 속을 감돌며 내 안쪽으로 되돌아온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나를 향해 직선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입은 열리지 않고, 목구멍은 잠긴 채 숨만 고인다.
말은 밖으로 뻗지 못하고 내 안에서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발이 헛디뎌진다.

추락.
몸이 허공에 놓이는 순간
내가 붙들고 있던 기준이 풀린다.
처음에는 천천히, 시간이 늘어나고 감각이 농밀해진다.
건물의 유리창이 기울어지고 불빛이 위로 멀어지지만
세계는 부서지지 않는다. 오히려 또렷해진다.
바람이 귀를 때리고, 차들의 경적은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둔해진다.
입안에는 쇠 맛이 번지고 심장은 과도하게 뛰지만
그 박동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가슴 안에서만 맴돈다.
떨어지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가벼운지 깨닫는다.
그토록 붙들고 있던 자리, 책상 위의 서류,
나를 규정하던 명함의 얇은 종이.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무게를 잃는다.
내가 중심이라 믿었던 것들이 실은 외곽에 매달린 표식이었음을 낙하에서 조용히 드러난다.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음 속에서 하나의 사실이 남는다.
낙하는 소멸이 아니라 비워짐이라는 사실.
그리고 깨어난다.
천장은 제자리에 있고 벽은 고요하다.
그러나 심장은 아직 아래로 향하고 있다.
목은 마르고, 손끝은 서늘하다.
숨은 짧고 얕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세면대로 간다.
형광등 아래 거울 속 얼굴은 창백하다.
눈동자는 아직 어딘가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미세하게 흔들린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차가운 물줄기가 세면대에 부딪히며 또렷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꿈속의 바람처럼 거칠지 않고
정확하다.
물을 두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는다.
차가움이 피부를 때리고 이마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숨이 한 번 크게 들어온다.
멈춰 있던 공기가 폐 깊숙이 닿는다.
세수를 하는 행위는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나를 다시 구조 안에 세운다.
흐르는 물은 멈추지 않고, 손은 제 역할을 다하고,
거울은 과장하지 않는다.
나는 내 얼굴을 확인한다.
무너지지 않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박동은 점차 속도를 되찾고
발바닥은 타일 위의 단단함을 감지한다.
이 장면은 거창하지 않다.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악몽에서 깨어난 뒤
세수를 하며 숨을 고른다.
물을 얼굴에 끼얹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다시 바닥을 찾는다.
도시는 창밖에서 아침을 열고 있다.
배달 오토바이의 진동, 버스의 공기 소리,
지하철의 금속성 울림.
세계는 여전히 제 기능을 수행한다.
악몽은 도시를 붕괴시키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의지하던 높이를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서 차가운 물을 맞는 그 순간,
우리는 안다.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높이가 아니라
되돌아올 수 있는 일상의 구조라는 것을.
우리는 완전히 강해지지 못한다. 완전히 부서지지도 않는다.
흔들림과 비워짐을 통과해
다시 숨을 고르고
다시 얼굴을 닦고
다시 걸어 나간다.
그 반복이 삶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