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불완전

입김 이후의 세상

by 윤담

겨울이 오면 세상은 단정해 보인다.
모든 색이 정리되고, 공기는 유리처럼 투명해진다.
사람들은 그 투명함 속에서 명확함을 본다고 믿지만,
실은 그 안에서 더 많은 것들이 가려진다.
맑다는 건 곧,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빛이 지나가야만 비로소 모양이 드러나듯,
삶의 투명함도 언제나 불완전하다.

삶도 그렇다.
겉으로는 분명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숨결이 서려 흐려진다.
한 번의 말, 한 번의 선택이
맑은 표면 위에 안개처럼 번지고,
그 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입김이 내려앉는다.
우리는 그 반복 속에서 살아간다.
닦아내면 선명해지지만, 곧 다시 흐려진다.
투명함은 잡히는 순간 이미 사라진다.

누군가의 인생이 단정해 보이는 건
그가 방향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신이란 언제나 의심이 오기 전의 짧은 평화,
그 계절이 지나면 다시 눈발처럼 흩어지는 불안이 남는다.
불안은 결국 인간의 가장 오래된 체온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살다 보면 다 알게 된다.”
하지만 살아보니, 오히려 반대다.
살수록 모호해진다.
옳음과 그름의 경계는 녹은 눈물처럼 스며들고,
그 사이에서 발을 디딜 자리를 찾는다.
지혜란 명확함을 얻는 능력이 아니라,
그 모호함을 견디는 힘일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출근길 유리창을 닦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손끝이 얼어붙고,
내 호흡이 닿을 때마다 유리 위로 희미한 입김이 번진다.
그 흔적을 닦아내면 잠시 세상이 투명해지지만,
곧 다시 흐려진다.
그게 삶의 리듬 같았다.
투명해졌다가, 흐려지고, 다시 닦여지는.
완벽히 맑은 순간은 없었지만,
그 불완전한 맑음이 하루를 움직였다.

저녁이 되어 퇴근길에 오르면
유리창엔 또 다른 입김이 남는다.
낮 동안의 사람들, 그들의 체온이 흩어져 남긴 자국.
그 흔적들이 한데 모여
창가를 뿌옇게 만든다.
그건 피로의 냄새이자,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잠자리에 누우면 지워지지 않은 말들이 떠오른다.
오늘의 대화, 어제의 후회, 내일의 불안이
겹겹이 쌓여 머릿속을 덮는다.
인생은 그런 안개 같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길을 더듬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개를 걷는 존재다.
가까이 보이던 것도 몇 걸음 뒤면 사라지고,
사라진 줄 알았던 것도
어느 날 불현듯 되살아난다.

마흔쯤이 되면 그 안개가 가장 짙어진다.
젊을 때의 불안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였다면,
이 시기의 불안은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이다.
시간은 뒤를 향해 미끄러지고,
가능성은 무게로 변한다.
유리창 건너편의 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희미해졌는지를 깨닫는 순간,
비로소 자신을 직면한다.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녹아내린 자리에서
사람은 조용히 되묻는다.
“이게 맞았을까.”
그 질문은 후회가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다.
이제는 커피의 온도, 아이의 웃음,
퇴근길 저녁빛의 잔열 같은 것들이
하루를 붙잡아준다.
삶이란 거대한 의미가 아니라,
그 작고 선명한 순간들의 합일지도 모른다.

겨울의 공기 속에서 나는 안다.
삶의 모호함은 결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을.
그 안개가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테니까.
질문이 사라진 순간,
인간은 살아 있지만 멈춘다.

그래서 오늘도 창가 앞에 선다.
하얀 입김을 내뿜고,
흐릿해진 세상을 다시 닦는다.
닦을수록 더 흐려지는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오히려 안심한다.
흐려진다는 건,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니까.

삶은 끝내 닦이지 않는 유리 한 장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김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희미한 안개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찾아 걸어간다.
그게 이 계절을 견디는 방법이며,
살아 있다는 건, 결국 이렇게 조금씩 투명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