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임진전쟁

임진전쟁 2. 동북아 정세

선비의 나라 조선 무사의 나라 일본

by 온기철 James Ohn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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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naverschool/221313257116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하고 마젤란이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을 항해 해서 1521년에 필리핀에 도착 했다. 이와 같이 15-16세기는 서양사람들이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던 대항해시대의 시작이었다.


1543년 8월25일, 규슈 남쪽에 있는 작은 섬 다네가시마 에 중국 선박이 표류 했다. 이배에는 포루투칼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섬의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다카에게 조총을 소개 했다. 50보 떨어진 거리에서 조개 껍질을 박살 내는 조총의 위력을 본 그는 비싼 값을 치르고 조총 두자루를 구매 했다. 16세에 불과 했던 그는 조총을 분해해서 제작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하고 화약 제조법을 배웠다, 1년후에 조총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74201#home


조총이 들어올 무렵 일본은 다이묘(영주)들의 세력 다툼으로 전국이 전화에 휩싸여 있었다.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쇼군의 권력이 약화되자 전국의 다이묘들은 대권을 놓고 서로 싸우기 시작 했다. 센고쿠 시대(1467-1590년)의 시작이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은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츠요리의 군대와 전투를 벌렸다, 전자는 조총으로 무장 했고 후자는 활을 사용 했다.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승리 했다. *조총은 일본말로 댓뽀인데 무뎃뽀라는 말은 조총없이 라는 뜻으로 무모하게 덤비는 경우에 쓰는 말이 되었 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의 힘을 빌어 16세기 중엽에 일본을 거의 통일 했다. 그러나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 에게 피살 당했다. 오다의 충복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드히데를 공격하여 살해 했다. 하급 사무라이였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길거리에서 바늘장사를 하여 생계를 유지 하고 있을 정도로 가난 했다. 오다의 부하가 된 그는 온갖 궂은 일을 다하며 철저히 복종하여 오다의 신임을 얻었다. 마침내 그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1583년 오사카 성을 쌓고 1584년 도쿠가와 이에에스와 화해를 함으로 서 사실상 일본 천하를 통일 했다. 1585년 천황은 그를 관백에 봉하고 1586년에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사쓰마 국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마지막으로 고호즈 일가를 굴복 시켜 통일의 마지막 마무리를 마쳤다.


60개의 번으로 갈라져 100여년 동안의 전쟁을 치루는 동안 사무라이들은 무척 바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할일이 없는 사무라이들은 불만이 쌓였다. 미천한 출신인 도요토미 또한 무엇인가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옛 보스 오다로 부터 대륙정벌에 대한 야망을 항상 듣고 지냈던 그는 명나라 정벌 계획을 추

진하기 시작 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여름휴가를 명나라에서 보내게 해 주겠다고 입 버릇 처럼

말하곤 했다


조선


일본이 100여년의 내전에 휩싸여 있는 동안 조선은 야에 묻처 있던 사림파가 기득권 층이었던 훈구파에 도전하여 새로운 보수 세력으로 등장 하고 있었다.


조선 제9대 왕 성종은 1469년에서 1494년 까지 재위 했다. 일본 센고쿠 시대 초기에 해당 한다.

조선이 일본에 보낸 사신이 배멀미로 대마도에서 돌아 오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두절 되었던 시기이다.

조선은 건국 중신들의 세상이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하사 받아 새나라의 기득권 층을 형성 했다. 이들을 훈구파라고 한다. 한편 정몽주, 이색, 길재등 온건파 신진 사대부에 그 근원을 둔 유학자들이 있었는 데 이를 사림파라고 했다. 이들은 야에 묻혀서 학문연구와 교육에 몰두 했다. 그들은 왕권을 기반으로 한 향촌 지주 중심의 통치 방법을 선호 하였다.


세조의 반정 이후 훈구파의 권력 집중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 났다. 대의 명분이 없는 세조의 권력 찬탈은 자연히 왕이 소수의 공신들에게 국정운영을 철저히 의지 할 수 밖에 없었다. 논공행상 에서 얻어진 막대한 토지와 혼인으로 엮어진 왕실과의 인척관계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권력 층을 형성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향촌 지주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성종도 훈구파의 횡포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 었다. 성종은 사림파 인사들을 등용하기 시작 했다. 드디어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 다툼이 시작 되었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의 기묘사화, 명종 때의 을사사화를 거치고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파가 득세하게 된다. “사화”는 사림파의 “화”라는 뜻이다.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려 한 사건이 사화이다. 백성과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사욕을 채우려는훈구파에 반기를 든 강직한 사림파가 억울하게 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이 일어 났던 선조시대에 성리학이 꽃을 피웠다. 이이(이율곡)과 이황(이퇴계)가 활동하던 시기이다. 조선 왕중에 최고의 명필이었던 선조는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기를 즐겠다. 그야말로 사림파들이 좋아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림파는 둘로 갈라졌다. 당파의 시작이었다.

서인은 윤두수, 정철등 나이많은 대신들이었고 동인은 유성룡, 김성일등 신진 젊은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조정은 동인이 우세한 편이었다.


이와 같이 16세기 일본은 무사의 나라였고 조선은 선비의 나라 였다. 전쟁은 힘의 균형이 깨지면 일어나는 법이 아니었 던가? 양국의 군사력 차이는 극명 했다.


명나라


명나라의 만력제는 일종의 정치 파업 중이었다. 일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환관이 정치를 했고

부패가 만연 했다. 만력제의 스승은 장거장 이었다. 그는 무척 엄격하여 만력제는 그를 두려워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라면 모두 의심의 여지 없이 믿고 따랐다. 특히 그는 검소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던 중 장거정이

거액의 부정축재를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만력제 에게는 청천벽력 이었다. 그는 실의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만력제 재위동안 명나라 주위에서는 3대 정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남쪽 산악지대 파주에서는 양응료의 난(1591-1600), 북쪽 몽고 지방 영하에서는 보바이의 난(1592년), 조선에서는 임진왜란(1592-1598)이 명나라를 괴롭히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이래 사대주의를 채택하여 명과 군신관계를 맺었다. 조선의 왕은 명나라 황제로 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제도 였다. 조선이 하나를 가지고 북경을 방문하면 명은 셋을 조선에게 주었다. 체재비와 물품운반비도 명나라가 부담 했다. 명은 조선의 내정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조선은 외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명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군신관계는 명이 조선의 국방을 맡아 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본과 명나라는 군신관계가 아니었다. 일본이 조공을 허락 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겨우 10년에 한번씩 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1547년 명은 일본의 조공선 입항을 금지 했다. 자연히 명나라 항구에 왜구가 창궐 했다. 일본은 조선에게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해달라고 여러번 부탁 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겨우 마카오를 통해서 명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명이 대국 즉 1등국가이고 조선은 2등 국가이며 일본은 3등 국가로 유지되었다.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 항상 상국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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