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임진전쟁

임진전쟁 10. 제2차 진주성 전투와 강화조약

도요토미는 책봉을 기꺼이 받았다

by 온기철 James 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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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고니시, 함경도에서 가토의 군대가 후퇴하여 한양에 집결 했다. 북진해온 일본군 전병력 이었다. 1953년2월에 권율이 지키고 있는 행주산성을 공격 했으나 실패 했다. 이순신이 남해와 서해를 장악하고 있어서 본국으로 부터의 보급이 차단 되었다. 거기다 당시 조선에 기근이 왔고 전염병이 돌았다. 군량미가 부족하여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명군은 군량미 대신 은을 가지고 와서 군량미를 현지조달하려 했으나 기근으로 군량미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본군이 퇴각하고 있는 마당에 자국의 병력을 손실 시켜가며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양측은 협상으로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다.


용산에서 심유경과 고니시가 만났다.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 할것과 인질로 잡힌 두왕자를 석방 할 것을 요구 했고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명군이 요동으로 철수 할것과 도요토미의 일본왕 책봉등을 위해서 일본에 강화사를 보낼 것을 요구 했다.


일본군은 1953년4월18일 인질로 잡은 두왕자와 함께 울산과 거제로 총퇴각 했다. 본국으로 부터의 보급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조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명의 만류로 어찌 할 수 없었다. 또한 명과 일본의 협상 과정에서 조선은 완전히 배제 되었다.


도요토미는 일차 진주성 공략 실패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는 고니시에게 전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 함락하고 전라도를 공격 할 것을 명령 했다.


일본군은 10만 대군을 동원 했다. 진주성 안에는 군사 6천명과 주민 그리고 피난민 5만이 있었다.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성을 방어하자는 파와 성을 비우고 일단 일본군에게 내 주자는 파로 갈라 졌다. 전투가 벌어지기 얼마전에 초유사 김성일이 사망 했다. 김성일은 적정을 살피려고 일본에 다녀와서 도요토미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본심이 강직하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하는 일에 충실한 신하 였다. 당파 때문에 저지른 실수 였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펴 볼 때 그가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했어도 전쟁준비가 원활이 이루어 질 가능성은 희박 하다도 생각 한다. 선조는 그를 경상도 지방 초유사로 임명 했다. 그는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율하여 전쟁을 효율적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진주성 전투에 대한 단결 된 결론을 내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은 진주성이 함락 되면 전라도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진주성을 방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희와 많은 의병장이 김천일과 같이 성 사수에 동의 했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 의병장 곽재우는 성을 비우고 후퇴 할 것을 주장 했다. 성 방어에 실패하면 군사과 백성들의 목숨만 헛되이 희생되기 때문이었다.


심유경은 황급히 고니시에게 공격을 중지 해달라고 요구 했다. 고니시는 성을 비우고 후퇴하라고 했다. 자기는 도요토미가 원하는 대로 성만 함락 하면 그뿐이라고 했다.


1593년6월21일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 했다. 1차 전투 때는 후방에 남아 있는 실전에 서툰 병력이었다.

이번 에는 전방에서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병 이었다. 일차 때는 성 뒤쪽에 있는 해자를 메우지 않고 전면에서 만 공격 했는 데 이번에는 해자를 메우고 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철갑으로 지붕을 씨운 바퀴달린 귀갑차를 만들어 성벽 가까이 접근하여 폭파 시켜 성벽을 무너뜨렸다.


1차에 비해서 잘 준비된 공격이었다. 일본군은 9일 동안 무려 200 차례 공격을 가해 왔다. 그동안 성안의 장병과 백성들은 원군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은 성안으로 들어와 군관민 6만명을 도륙 했다. 산 생명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충청병사 황진은 적 탄에 맞아 전사 했고 의병장 김천일과 아들 김상건,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은 남강 물에 뛰어 들어 자결 했다. 진주 목사 서예원은 전사 했다. 6월29일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 되었다.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남원을 공격 했으나 실패하고 퇴각 했다. 전면적인 전라도 공략은 하지 않았다.

도원수 권율의 말을 듣고 성을 비워 주었으면 6만명의 생명이 온전 했을 지도 모르 지만 전라도 공략을 중단 한 이유가 진주성 전투에서 입은 피해 때문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 할 수 있을 까?


일본군의 사상자는 13,000명으로 추산 했다. 남은 일본군 명력은 약 9만이 되었다. 촉석루에서 승전 축하 연이 열렸다. 수청을 들던 논개가토의 부장 게아무로 루쿠스케를 안고 남강으로 투신 했다.


전라도 좌의병 지휘부가 전멸 하자 전국 최강의 전라도 의병이 와해 되었다. 초유사 김성렬의 종사 이로

진주대첩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기록 한 용사일지를 남겼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 했지만 전라도 공세에 실패한 후 울산과 부산지역 왜성으로 후퇴하여 전쟁은 사실상 휴전 국면에 들어 갔다. 일찌기 싸우기를 포기 한 명나라도 심유경을 앞세워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시도 했다. 일본측 협상 상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또한 가망 없는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고 귀국 하려 했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 하고 인질로 잡은 두 왕자를 조선에 돌려 보내고 도요토미가 전쟁에

대해서 사과 하라고 일본 측에 요구 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게 황실의 공주를 자신의 첩으로 보내고

조선의 왕자와 대신12명을 일본의 볼모로 보내고 일본이 명나라와 통상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조선 4도 즉 한양을 제외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일본에 양도 하라고 요구 했다.


협상 당사자인 심유경과 고니시는 도요토미의 요구를 명나라와 조선이 받아줄리가 없다고 판단 했다. 종전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의기가 상통한 심유경과 고니시 유끼나와는 항복문서를 위조하기로 합의 했다.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니시에게 보낸 종전 문서에는 그의 요구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와 심유경은 마치 도요토미가 명나라 황제로 부터 일본왕으로 책봉 되기를 원하고 일본이 명의 조공국이 될것을 바라는 것 처럼 문서를 위조 했다. 고니시는 위조된 문서를 부하 나이토 조안에게 주어 명나라로 보냈다.

명나라 조정은 한동안 이문서가 위조 된 것이라고 의심하다가 조공(통상)은 거절하고 책봉은 해주기로 결정 했다. 명나라는 양방형과 이종성을 책봉사로 임명하여 1596년 이들은 부산에 도착 했다. 이들은 명나라 황제가 보낸 칙서를 가지고 도요토미를 왕으로 책봉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가야 했다.


1596년 일본군과 명군은 전쟁이 끝났다고 판단 하고 각각 일본과 명으로 철군 했다. 2차 진주성 전투가 끝나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지 3년만이었다. 일본은 인질로 잡았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 이때 명나라 사신 정사 이종성이 도요토미가 명나라 사신을 잡아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도주 해 버렸다. 다행히 그가 황제의 칙서와 인장을 두고 가서 부사 양방형이 정사가 되고 같이 갔던 심유경이 부사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황신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조선이 인질로 왕자를 보내지 않았다고 황신을 만나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중신들이 입회한 자리에 양방형, 심유경과 승려 사이쇼 조타이가 읍소 했다. 도요토미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는 명나라 황제의 책서를 도요토미에게 읽어주는 임무를 맡았다. 책서에는 책봉이외에 도요토미가 요구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심유경과 승려 사이쇼는 책서에 쓰여 있는 대로 읽지 않고 도요토미가 요구한 조건을 열거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쇼는 있는 그대로 읽어 버렸다.


도요토미는 대노 하여 재침을 명령 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난 연유 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짜문서에 도요토미가 속았다는 정유재란 발발의 자초지종이다. 그러나 최근 포스팅 된 나무위키에 의하면

도요토미가 책봉을 받아들였으나 조선이 왕자를 볼모로 보내지 않아서 대노하여 재침 했다고 한다.

종래의 가짜문서 설은 전쟁후 국수주의 자들이 조작한 역사라고 한다. 참고로 나무위키의 해당 부분을 개제 한다.


4.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편집]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강화파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심유경이 전쟁을 끝내려고 국서를 조작해 양쪽을 구슬려삶으려다 승려 사이쇼 조타이에 의해 탄로가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노하고 강화가 파기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154] 히데요시는 회담의 진행에 적당히 개입을 하고 강화 조건을 조절하면서 명나라가 '책봉은 가능하지만 무역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책봉을 받고 나서 돌연 '조선에서 사죄의 표시로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화를 낸 후 조선이 명과 일본을 이간질했다는게 주요 논리인 세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다만 책봉을 받은건 확실한게 당장 히데요시의 책봉 교서와 만력제의 칙유, 관복, 인장이 지금까지도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연대기의 내용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다.#


4.5.1. 기존에 잘못 알려진 설[편집]

20세기까지만 해도 상기되어있듯 강화 회담 관련해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155]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고, 일본국왕 책봉 따위는 필요없다며 분노한 히데요시가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고 민간엔 알려져있었다. 그리고 심유경은 문서 조작과 강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 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리고,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 추궁으로 처형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해 이듬해(1597년) 정유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는 설이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4.5.2. 왜 잘못 알려졌는가?[편집]

21세기 들어 사료를 검토해 본 한중일 학계의 결론은 이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유학자와 병법가들이 내용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이게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해당 이야기가 실제 사실인냥 알려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는 국학이 등장하면서 자국을 높이고 타국을 깎아내리는 풍조가 성행했다.[156]

책봉의 진상을 알고 히데요시가 화를 내고 강화를 깼다는 왜곡된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가 아닌, 에도시대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호리 교안(堀杏庵)이 1659년 출판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것은 이후 병법가인 야가마 소코(山鹿素行)의 '무사가기', '신편무사가기'(1673년)에서 책봉문을 찢었다는 내용으로 발전하였고, 유학자 하야시 라잔의 '풍신수길보'에 윤색되었다. 이는 국학자모토오리 노리나가가 1796년 펴낸 어계개언(馭戒慨言)에서 임진왜란이 한반도를 재복속하는 것이고 조선통신사는 조공사라는 내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 유명한 학자들이 쓴 것은 맞지만 사실을 기록했다기보다 당시 유행한 국수주의적 국학의 관념을 깔고 있는 것이었고 일본을 미화하는데에 집중한 것들이었다. 이 책들이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히데요시의 강화 파기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일본의 자국 찬양과 한반도의 멸시, 나아가 정한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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